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선 2035

‘일하고 싶어 죽겠다’에서 ‘일하다 죽겠다’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기사 이미지

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

대학 신입생 시절 나와 친구들은 저마다의 미래를 품고 있었다. 산업은행에 들어가겠다던 Y는 수학 과외를 받아 가며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을 오갔다. L은 방송국이 궁금해 방학 중에 방송사 소품 담당 같은 허드렛일을 도왔다. 나도 외교관을 목표로 해외 한국 공관에서 무급으로 일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맞닥뜨린 취업 문턱은 높아도 너무 높았다. 탈락 통보 문자가 익숙해질 때쯤 누군가 말했다. “일하다 쓰러져도 좋으니 제발 어디든 합격했으면 좋겠다.”

 말이 씨가 된 걸까. 가까스로 취업이 된 녀석들은 원하던 격무를 마음껏 체험했다. 방송국 피디가 된 친구는 불규칙한 퇴근에 시달리다 1년 만에 관뒀다. 번듯한 대기업에 들어간 녀석도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라는 팀장을 만나 틈날 때마다 이력서를 쓴단다. 기자가 된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참 야근이 잦던 1년 차 땐 모처럼 일찍 들어온 날 보고 놀란 아버지가 “너 기자 맞느냐, 관뒀느냐”고 물었을 정도니까.

 스물여섯의 짧은 생을 살다간 일본인 모리 미나는 취업난에 열정이 희생된 극단적인 경우다. “죽을 때까지 일하라.” 모리가 합격한 일본의 유명 외식업체 와타미의 슬로건이었다. 회사는 모리가 죽을 때까지 일만 시켰다. 전철이 끊긴 심야에 택시비조차 주지 않아 모리는 가게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휴일에는 본사 연수에 불려가 창업자의 어록을 외우고 시험을 봤다. “안 된다고 하지 마라” “일을 끝냈을 때가 끝이지, 업무 시간 일했다고 끝이 아니다”…. 그는 매달 141시간의 잔업에 시달렸다. 일본 과로사 인정 기준(80시간)의 두 배 가까운 업무량, 결국 모리는 입사 두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와타미가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블랙 기업’이라는 비난에 창업자는 오히려 “그렇게 따지면 일본에는 블랙 기업이 1만 개는 있을 거다”고 큰소리쳤다. 결국 이 회사는 손님들이 등을 돌리고 매출이 급감해서야 고개를 숙였다. 지난 8일 유가족에게 1억3000만 엔(약 13억원)을 배상하기로 하고 사죄한 것이다. 모리가 떠나고 7년 반이 흐르고 나서였다.

 일본만 혹사에 가까운 초과 근무를 강요하는 건 아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근로시간 실태를 분석해 보니 356만7000명이 법정 초과근로 한도를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돈 받고 일하는 5명 중 1명꼴(19%)로 제2의, 제3의 모리가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현실에도 2년째 같은 목표를 좇고 있는 후배를 만났다. “선배, 욕먹어도 좋고 맨날 야근해도 좋으니 일단 합격만 했으면 좋겠어요.” 내년에도 다시 도전할 거라는 후배의 불타는 의지에 ‘나는 저녁만 가족들이랑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다.

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