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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Special Knowledge <602> 경북 영주 소수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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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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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정 기자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이자 인재를 배출한 요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포함한 9개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고, 2016년 세계유산 등재 결과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중앙일보가 만든 온라인 청소년 매체 TONG청소년기자단이 정진영(안동대 사학과) 교수와 함께 소수서원을 찾아 건축에 담긴 의미를 알아봤다.

조선 첫 서원인 소수서원, 13번째 세계유산 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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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였던 소수서원의 입구. 1542년 주세붕에 의해 건립된 소수서원은 크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 영역과 학문을 갈고닦는 강학 영역으로 나뉜다. 소수서원 입구에 놓인 정자 ‘경렴정’은 공부에 지친 유생들을 위한 공간이다. 우상조 기자

퇴계 지원 요청에 현판 하사한 명종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대 격인 서원은 선현을 기리고 제자를 양성하는 두 가지 기능을 했다. 경북 영주 순흥면에 위치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만들고 이듬해 학사를 옮겨지어 백운동 서원을 세운 것이 시초다. 안향은 중국에서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인물이다.

 당시 서원은 교육보다는 제사 중심의 공간이었다. 그러던 것이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달라졌다. 퇴계가 왕에게 서원을 적극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하자 명종은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왕이 현판을 내렸다고 해서 이를 사액(賜額)서원이라고 한다.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이 된 것이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시행했을 때 남겨 둔 47개 서원 중 소수서원도 포함됐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후세에 전해진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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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유생들이 모여 강의를 듣던 명륜당.

서원 곳곳에 당간지주 등 불교 흔적

 서원 입구에서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다 보면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볼 수 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숙수사의 유적이라 추정된다. 당(幢)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불화를 그려 달았던 깃발이다. 당을 걸었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고, 이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일컫는다.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인 숙수사의 유적을 어떻게 유교 문화의 산실인 소수서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돼 고려시대까지 존속돼오다 조선시대의 어느 시기에 법통이 끊기고 터만 남은 숙수사지에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1456년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이끈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세조가 순흥부 주민을 학살한 사건인 ‘정축지변’ 당시 숙수사가 불탔다. 하지만 이 돌만큼은 온전하게 남아 사라진 불국토의 아픔을 전한다. 조선시대 배척했던 종교인 불교의 자취도 서원을 건립할 때 필요에 따라 재활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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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의 중심에는 넓은 마루가 놓여 있다.

유생들이 마음의 여유 찾던 경렴정

 소수서원에 들어서기 바로 전에 죽계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는 정자를 볼 수 있다. 이 정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 하나인 경렴정(景濂亭)이다. 경렴정의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의 호에서 ‘염’자를 따오고 높인다는 뜻에서 ‘경’자를 붙였다고 한다.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었다. 수령 500여 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정자를 바라보면 선인들이 음풍농월을 즐기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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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TONG기자단과 정진영 교수.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서원은 자연의 이치를 통해 배움의 깊이를 더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백운동 경자바위엔 주세붕 글씨

 죽계수 건너편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볼 수 있다. ‘경(敬)’자는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세우고 쓴 글씨다.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으로 선비들의 지침이 되었다. 후에 퇴계는 경자 위에 ‘백운동(白雲洞)’ 석 자를 새겼다. 백운동이라는 이름은 소수서원의 터가 송나라 때 백록동 서원이 들어선 여산처럼 구름·산·언덕·강물과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다며 주세붕이 따온 것이라고 한다.

 성생단은 향사 전날 제물들을 위에 올려놓고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피며 제물로서 합당한지 검토하던 곳이다. 생단(牲壇)이라고도 한다. 임금이나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는 제물로 반드시 소나 양이 쓰였고, 그 외에는 보통 돼지가 쓰였다. 지금은 정사각형 평면에 잔디를 심고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 서원의 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생단은 서원 입구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향·주세붕 초상 모신 영정각

 서원의 공간은 크게 제사를 지내는 제향 영역과, 학문을 갈고닦는 강학 영역으로 나뉜다. 서원 입구에서 수백 년 세월을 자랑하는 노송군락을 지나 정문 홍전문에 들어서면 우람한 강학당을 마주한다. 명륜당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유생들을 두고 학문을 강론하던 강의실이다.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1543년 군학사를 옮겨와 강학당으로 썼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이 있고 방은 한쪽에만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 웅장하면서도 고색을 잘 간직하고 있다. 사방에 문이 달려 있고, 건물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빙 둘러 설치했다. 대청에는 ‘소수서원’ 편액이 높이 걸려 있는데, 명종의 친필이다.

 소수서원에 안향과 주세붕 등의 초상을 모신 영정각이 있다. 서원에 영정각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1975년에 따로 건립한 건물이다. 안향의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고려 충숙왕 때 공자의 사당에 있던 초상화에 하나를 더 옮겨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안향의 초상화는 현존하는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시대의 초상화 화풍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정각 앞에는 조그마한 테두리 안에 둘 두 개가 겹쳐 있는 해시계 일영대가 있다. 선인들은 맑은 날, 일영대 가운데 구멍에 막대기를 꽂아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일영대 안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학구재·지락재가 나온다.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기숙사다. 학구재는 ‘학문을 구한다’라는 뜻을, 지락재는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렇게 건물의 이름뿐만 아니라 학구재와 지락재의 건물 구조에서도 유생들의 학문과 관련된 재미있는 특징 2가지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학구재·지락재 둘 다 3칸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숫자 3은 학문에서 진리의 수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두 건물의 입면이 ‘工’자 형태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工’은 ‘공부(工夫)’의 앞글자인 ‘공’을 따온 것으로 유생들의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

사서삼경서 따온 이름, 일신재·직방재

 일신재·직방재는 원장, 교수 및 유사(단체의 사무를 맡아보는 직무)의 집무실 겸 숙소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지락재와 달리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졌고 편액으로 두 곳을 구분하고 있다.

 이 건물 역시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동재인 일신재의 ‘일신(日新)’은 ‘나날이 새로워져라’라는 뜻으로 ‘대학(大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서재인 직방재는 ‘깨어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 건물의 위치를 통해 당시의 윤리의식을 알 수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지락재는 교수들의 건물인 일신재·직방재보다 한 자 낮게 뒷물림돼 지어져 있는데,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공경의식이 건축에도 반영됐기 때문이다.

 또 일신재·직방재도 강학당 뒤편으로 2칸 정도 물러 있으며, 마루와 방의 높이도 강학당보다 한 단 낮다. 사람이 거처하던 숙소를 강학당보다 낮춘 것에서 선인들이 얼마나 선현의 학문을 숭상하고 공경했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강학당 뒤쪽의 장서각은 서원의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을 보관했던 곳으로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에 해당된다. 장서각에는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御製) 내사본’을 비롯해 3000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간소한 구도로 정면에는 칸마다 판문을 달았고 내부는 마루를 깔았다.

 장서각은 원장과 교수가 지내는 일신재·직방재의 서쪽에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2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선인들이 서책을 으뜸 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의 숙소인 일신재·직방재 옆에 도서관을 지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서쪽을 높게 여기는 우리나라 고유 사상에 따라 선현들의 가르침이 담긴 책들을 서쪽에 둠으로써 그만큼 책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문성공묘, 임금이 인정한 사당

 장서각 서쪽에 해당하는 왼편의 문성공묘부터 제향 영역이다. 문성공묘 뒤편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재물을 준비하던 전사청이 있다. 일반적으로 전당후묘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서쪽을 높이 쳤던 우리 전통사상에 따라 강학공간 측면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독특한 사례다.

 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사당으로 성리학의 시조라 불리는 문성공 안향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사당에는 묘와 사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당을 ‘사(祠)’라 칭하지만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라 칭한다. ‘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가 있다. ‘묘’로는 역대 임금들을 모신 종묘, 공자님을 모신 문묘가 있다. 즉, 제왕 급의 중요한 인물을 모신 사당만을 ‘묘’라 칭하는 것이다. 안향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사당을 문성공묘라고 칭하는 것에서 안향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알 수 있다. 문성공묘의 내부는 평상시 개방하지 않으나 매년 봄, 가을 두 번 제사 때만은 문을 연다.

‘한국의 9개 서원’ 내년 등재 준비 중

 소수서원을 비롯한 ‘한국의 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라 있으며, 2016년에 등재하려고 준비 중이다. 1871년(고종 8년) 서원 철폐령 때 살아남은 서원(47개) 중 사적으로 지정된 9개의 서원을 묶어 ‘한국의 서원’에 포함시켰다. 돈암서원·무성서원·필암서원·옥산서원·병산서원·도산서원·소수서원·남계서원·동도서원 등 9개다. 만약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다면 한국에선 13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이 기사는 TONG·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이 진행하는 ‘청소년 역사 바로알기 캠페인’의 하나로, 김민주·이소현(병점고 2)·장현정·안은수(안동 경안여고 2) TONG청소년기자가 취재하고 썼습니다. 자문=정진영 교수(안동대 사학과)

정리=이민정 기자 lee.minjung01@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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