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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⑥ "진실은 감방 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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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은 감방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 86년 권인숙씨 변론요지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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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씨를 변론했던 조영래 변호사. 그는 가해자인 부천서 형사 문귀동이 무혐의 처리되자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 법원에 재정신청을 내고 반대 집회를 열었다.[사진 중앙포토]

"권양이 처음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해 증언하고자 합니다."

86년 11월 21일 인천지방법원의 법정에서 권인숙씨에 대한 변론요지서를 읽던 조영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해 6월 위장취업을 이유로(공문서 변조 등 혐의) 구속됐던 권씨가 부천경찰서 조사 과정에서 성고문을 받았던 사건은 조영래의 개입으로 정국을 뒤흔드는 시국사건으로 발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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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우(변호사)

그 즈음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 변호사들이 자주 모였는데,  첩보같이 성고문 얘기가 소문처럼 들렸었죠. 그런데 어느날 이상수 변호사가 그 모임에 와서 아주  흥분해 가지고 권인숙 얘기를 했어요. 권인숙을 면회하고 왔다면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지금 터졌다."

전부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 놀라기도 하고 의분도 일어나고, 격앙된 분위기가 됐죠.

'당장 다시 가서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알아보자’고 해서 저하고 조영래가 인천으로 갔죠.  아마 인천소년교도소였을 거예요. 권인숙이 활동한 게 그쪽 관할이라서.

서울대 나왔는데 학력을 속이고 공장에 들어갔지요. 위장취업 학생 단속과정에서 권인숙이 체포됐는데, 그 과정에서 성고문을 당했다는 거였죠.

조영래하고 권인숙을 만나서 첫날 한 시간 반쯤 면회를 한 거 같은데요.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쭈욱 한 시간 반 얘기한 거 들었으니까 ‘이제 대강 다 된 거 같은데, 이제 그만 끝내고 가지’ 이런 생각인데 조영래는 그때부터 시작이에요. 하나하나 꼬치꼬치 세밀하게 전부 다 파고들어서 기록을 하면서 면담을 하는데… 사건의 내막을 거의 완벽하게 파악을 해가지고 나왔어요.

정법회 친구들 만나서 전부 보고를 했죠.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이거는 통상의 방법으로 할 게 아니라 이런 놈은 우리 변호사들이라도 나서서 고발인이 돼야 한다”고 했죠. 그날 모인 변호사가 모두 공동 변호인이자 공동 고발인이 되기로 한 거죠.  고발장을 조영래가 썼습니다. 제가 수십 년 변호사 생활하면서 직접 고발인이 된 건 처음이었요. 변호사들이 직접 자기 이름으로 고소·고발 안 하려고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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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권인숙.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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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서울시장)

조영래 변호사님은 사안의 성격을 규정하는 힘이 있으셨어요. 더 나아가 그것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와 위상을 갖는 일인지까지. 권인숙 양 사건도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일반적인 인권침해 사건 정도로만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정권을 뒤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조 변호사는 정확히 처음부터 깨닫고 그 당시 최고의 인권 변호사들을 쫙 조직해 그것을 소송 외부에서 활용했죠.

9명의 변호사가 그 당시에 가장 국민의 신망을 받던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면서 김 추기경이 권양에게 쓰는 서한을 하나 엽서로 받아가지고 저희가 복사를 해 보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 김 추기경도 개런티하는 상황’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거죠. 그때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성을 혁명의 도구화한다’는 식으로 공박을 했었거든요. 그걸 뒤엎는 데 그리고 가톨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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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서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 발생 1년11개월만에 첫 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에 호송되는 문귀동피고인. 문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사진 중앙포토]

권인숙과 함께한 조영래의 법정 투쟁은 가해자 문귀동 경장 등을 고발하던 86년 7월부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리하던 1990년 1월까지 계속됐습니다. 이때 정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을 출연해 설립한 것이 ‘노동인권회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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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 전 시민공익법률상담소장)

굉장히 열심히 집중을 해서 했어요. 본인의 전 내공을 다 쏟아부었던 거 같아요.

사건이 잘 마무리돼 손해배상금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적게 나왔어요.

유홍준 씨를 큐레이터로 해서 기금 마련 그림 전시회를 했고, 그 그림을 팔아 ‘노동인권회관’을 설립했죠.  그림 전시회 기획, 큐레이터 선정 및 판매에 이르기까지 조 변호사님이 많이 관여했는데 그 수완이 뛰어났어요.

‘노동인권회관’이란 이름도 조 변호사가 만들어 준 것이고요. 평소에 ‘노동자들 교육하고 상담하고 노동운동을 돕는 공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권인숙 씨가 그곳에서 일을 하게 하는 게 좋겠다’는 배려도 있었고요. 노동운동이 굉장히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펼쳐놓고 일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죠.

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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