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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13세기 전 바이킹의 규율과 21세기 한국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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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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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논설위원 겸
고용노동 선임기자

아일랜드 더블린, 영국 요크, 우크라이나 키예프, 프랑스 노르망디…. 북유럽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다. 바이킹은 북위 60도의 척박한 땅에서 무역을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들의 무덤에선 북인도의 불상과 아랍어가 새겨진 자수정 반지가 발견된다. 전 세계를 휘저었던 교역 규모를 짐작케 한다. 그 동력은 용맹함 속에 감춰진 규율(Viking Laws)이었다. 무법천지이던 당시 유럽에서 바이킹은 규율을 국가의 기초로 여겼다. 13세기가 지난 지금도 무릎을 치게 하는 내용이 많다.

최악의 품질인 한국 정치 탓에 도약 기회 흔들
바이킹의 처벌인 응징의 터널, 지날 때 됐나

 바이킹의 규율은 크게 아래의 네 가지다. 항목마다 구체적인 행동지침이 있다. 이걸 곱씹으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흘려들을 수 없는 충고가 된다.

 1. 용맹하라. 이 항목의 지침은 ‘직접 대응하라. 기회를 움켜쥐어라. 공격할 땐 융통성 있는 방법을 쓰라. 한번에 하나의 목표를 공략하라. 너무 자세하게 계획을 수립하지 마라. 최고 품질의 무기를 쓰라’다. 지난 9월 15일 노사정이 대타협을 했다. 고용시장 전반을 개혁하는 내용이다. 선진국이 놀랄 정도다. 스페인 같은 나라는 부러워한다. 대타협의 목표는 하나다. 경제활성화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잡을 수 있을지 기약하기 힘들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어그러졌다. 이념과 정략적 판단에 국가적 목표와 기회가 날아갈 위기다. 국회는 대립이 일상화돼 유연함을 기대하기 힘들 지경이다. 용맹은 사라지고 용렬한 모습뿐이다. 한마디로 정치는 최악의 품질이다. 이런 무기로 한국호가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까.

 2. 준비하라. ‘좋은 상태로 무기를 관리하라. 몸 상태를 잘 유지하라. 함께 싸울 좋은 동료를 확보하라. 중요한 순간에는 이견을 보이지 말고 힘을 합쳐라. 한 명의 수장(지휘자)을 선택하라.’ 얼어붙어 메마른 땅에 살던 바이킹처럼 우리에겐 자원 대신 사람이 무기다. 한데 2년마다 돌려막기식으로 고용하고 임금 격차와 차별도 심하다. 인력을 비용으로 따지는 사용자의 이해타산에 정규직 노조의 기득권 지키기까지 가세했다. 청년들은 스펙 쌓기로 대학 생활을 허비한다. 취업전선에선 이런 게 안 통해 실업률만 올라간다. 장기적 안목으로 준비하기보다 땜질 처방전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해법이 안 나온다. 자기 주판만 두드려서다. 이러니 ‘팔자’ 타령만 는다.

 3. 훌륭한 상인이 돼라. ‘시장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라.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라. 바가지 씌우지 말라. 철수할 때를 대비한 깔끔하게 정리된 대책을 마련하라.’ 노동시장이란 토지의 지력이 다했다. 객토하고 거름을 줘야 한다. 일자리 식물을 키우려 국민 상당수가 원한다. 그런데 이건 뒷전으로 밀려나고 복지정책이 난무한다. 국민연금이 고갈되고 국가재정이 휘청할 수 있다는 정부의 재정추계 발표도 소 귀에 경 읽기다. 이러다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국민에게 바가지 씌울 게 뻔하다. 1조 농어촌상생기금이란 할당 바가지도 나오지 않았는가. 출구전략이 없으니 한번 난관에 봉착하면 우왕좌왕하기 십상이다. 외환위기 때처럼 외국에 손을 벌리지 말란 법이 없다. 그때 우리는 무슨 내용의 자기소개서를 쓰게 될까.

 4. 캠프는 질서정연하게 유지하라. ‘물건은 말쑥하고 정돈된 형태로 관리하라. 강한 조직으로 만들어 줄 여흥을 마련하라. 모든 사람이 필요한 일을 하는지 점검하라. 모든 조직원에게 더 나은 방법이 없는지 자문하라.’ 일사불란하되 여론을 수렴하고, 과실을 나눠 가지는 흥겨운 마당이 엿보인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공익의 입장에서 제대로 수행해야 국가가 굴러간다는 대원칙도 있다. 지리멸렬한 야당이나 꼭 필요한 곳보다 사익을 위해 예산을 흥정하는 우리네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정치권에 흥이 날리 만무하다.

 바이킹은 죄를 뉘우치고 일정한 시한 내에 자수하면 정상을 참작했다. 하지만 뉘우치지 않으면 사소한 절도조차 통로를 걷게 한 뒤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게 했다. 이 처벌 행사에 빠지는 사람은 벌금을 물었다. 돌은 여론이고, 응징이었다. 경제를 툰드라 지역으로 내모는 정치권이 응징의 터널을 지날 날이 다가오고 있다.

김기찬 논설위원 겸 고용노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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