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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잃은 가로수길·홍대앞…원흉을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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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기있는 상권에서 벌어지는 점포 임대료 폭등이 범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회 갈등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낮았던 도심 주변부의 낙후된 지역이 인기상권으로 뜨면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천정부지로 높여 결국엔 기존 상인들이 쫓겨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 소상인들의 저항과 사회적 문제제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형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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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이 뜨면 기존 상인들은 밀려나

국내 상업지구에서 벌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길게는 1990년대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로부터 시작해 이후 가로수길·홍대앞을 거쳐 대학로·삼청동·북촌·서촌·성수 등 인기상권 전방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진행과정은 비슷하다. 예술가의 작은 공방이나 개성있는 독립점포들이 모여 젊은층을 끌어들이면서 인기 상권으로 부상하고, 이어 홍대앞이 상수·합정 등지로 확장되며 홍대옆상권을 형성한 것처럼 상권이 주변지역으로 확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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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은 대형 프랜차이즈가 점령하면서 점점 개성을 잃어가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그러다 확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한계에 다다르면 치솟는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기존 상인들이 상권에서 내몰리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독립 점포 자리는 대기업형 프랜차이즈들이 차지하면서 몰개성한 상업공간으로 변모하고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형 상권이 형성된 터라 임대료는 내려가지 않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가로수길·홍대앞·대학로 등의 중심거리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점령
했고, 기존의 개성있는 독립점포들은 세로수길·홍대옆으로 옮기다가 경리단길·성수 등지로 터를 옮기고 이젠 여기서도 밀려나고 있는 중이다. 소극장이 밀집한 문화거리였던 대학로도 임대료를 이기지 못한 소극장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대형 프랜차이즈들이 차지한 몰개성한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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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로데오거리는 과거 젊은이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지만, 점차 대형 프랜차이즈가 점령하면서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초창기 신흥 인기 상권이었던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끝물이 어떤 모습인지 어렴풋이 보여준다. 이 거리는 명품부터 보세까지 개성있는 패션숍과 카페·레스토랑 등이 몰리며 한때 가장 '핫한 장소'로 젊은이들의 인기를 모았지만, 점차 대형 프랜차이즈와 자본력있는 상가가 점령하면서 몰개성한 거리가 되었다. 찾는이가 줄면서 문닫은 가게들도 드문드문 보일만큼 썰렁하지만 한번 오른 임대료는 내려가지 않고 고공행진 중이다. 이에 뒤늦게 합류한 상인들은 점포가 빠지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도 많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세계적 현상

젠트리피케이션은 전세계적 현상이지만 나라마다 양상은 모두 다르다. 1960년대에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학자 루스 글라스(Ruth Glass)는 런던의 주택혁신 과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 런던 공업지역의 공장들이 이전하거나 문을 닫으면서 비어버린 공장·사무실·창고 등을 개성있는 주택으로 개조해 젊은층에게 분양함으로써 낙후됐던 공장지대가 신흥 주택지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70년대 뉴욕 소호 개발 역시 도심 탈산업화로 비어버린 공장과 창고 등을 주택이나 예술가를 위한 도심공방으로 개조하면서 공장지대를 예술가와 젊은 지식인들을 위한 생활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통해 부동산개발업자들은 낙후된 도심재생이 큰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이후 슬럼화된 도심 지역을 신흥주택가로 개조하는 사업을 벌이며 젠트리피케이션은 더욱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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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낙후된 지역에서 아름다운 동네로 거듭 난 미국 샌프란시스코 하이트-애쉬버리.

그리고 도심재생사업 과정에서 빈민 원주민들이 자기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면서 계층갈등을 초래하는 사회문제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선 상업지구의 임대료 폭등이 쟁점이고, 서구에선 주택 문제가 쟁점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결국 부동산 개발업자 혹은 건물주들이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반면 원주민은 밀려나고 이용자들은 지대(地代)를 착취당한다는 구조는 유사하다.

물론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심의 낙후된 지역을 재생해 도시 미관을 정비하고,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이에 초기 다소 높은 임대료는 지역 재생 비용 차원에서 용인됐다. 그러나 지역 명성이 높아질수록 임대료의 오름폭이 점점 가팔라지면서 임차인들이 조금 더 큰 자본에 의해 계속 밀려나는 사이클이 반복되고, 지대가 노동과 삶의 공간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현재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에 대한 마땅한 해결방안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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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보헤미안이 직접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활기있게 만든 미국 뉴욕 베드포드-스타이브샌트.

그나마 현재 가장 긍정적인 것은 상업지구의 점포 임대료 상승문제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주 서울문화재단 금천예술공장은 젠트리피케이션 관련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세계적 동향과 해결책을 모색했다. 서울시는 현재 임차료 폭등이 나타나는 대학로·인사동·해방촌 등 서울시내 6개 지역에서 건물주-임차인-지자체 간 상생협약을 체결하고, 시가 부동산을 매입해 저렴하게 임대하는 등의 젠트리피케이션 종합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점포 임대료 문제는 건물주와 임차인의 사적 계약관계라는 점에서 서울시 대책의 실효성에 회의적 반응은 많지만 그래도 지자체도 문제로 인식한만큼 해결노력을 경주할 토대를 만든 점은 인정할 만하다.

자본에 의한 몰개성화가 진짜 문제

젠트리피케이션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지역의 몰개성화다. 현재 첨예하게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루어진 로데오거리나 가로수길·홍대앞·대학로 등은 기존의 정체성을 잃고 대형 프랜차이즈 상업거리로 변하고 있다. 이에 젊은층들은 또다른 신흥거리로 이탈할 수 있다는 경각심도 높아지고 있다. 당장의 높은 임대료를 챙기려는 이기심때문에 거리의 정체성과 개성을 잃으면 상권이 다시 퇴보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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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뉴욕시의 커뮤니티보드는 이런 주민참여형 공동체 운동의 사례를 보여준다. 1800년대 말에 활성화된 뉴욕시는 초기 시정부와 부동산업자들이 주도해 도시계획을 벌였지만 도시환경이 삭막해지고 개성이 없어지는 등의 숱한 시행착오를 거친 후 1950년대에야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도시환경을 바꾸는 커뮤니티보드 제도를 도입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59개에 이르는 커뮤니티에서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참여하는 커뮤니티보드는 토지이용부터 공공서비스와 커뮤니티 복지 등 다양한 문제를 직접 다루며 자기 지역 문제에 직접 개입해 지역의 정체성에 맞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고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법으로 지역 공동체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인정해주며, 공동체가 소중하게 여기는 자산은 소유주라도 함부로 팔 수 없도록 하는가하면 지역공동체가 자산을 매입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가의 일괄적인 도시계획이 아닌 공동체가 스스로 살고싶은 지역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지키고, 공동체의 영향력을 키워 개별 업주들의 횡포를 막는 등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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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창작공간 심포지엄 ‘예술가,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도시재생’에서 런던의 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앤드 프랫 런던 시티대 교수(문화경제학과)와 토론을 맡은 서울대 김경민 교수(환경대학원).

국내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현재는 치솟는 임대료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의 문제가 가장 크다. 하지만 더 진행될수록 몰개성화되는 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몰개성화된 거리는 지역 경쟁력도 약화시킬 우려가 높다는 점에서 이젠 건물주·임차인과 지역공동체가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지역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발전적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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