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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준조세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정치가 정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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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부와 여야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비준하며 조성키로 한 1조원 규모의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본지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무역협회 등 42개 경제단체와 연구기관이 모인 민간대책위에 기금 조성에 찬성 입장을 밝히라고 사실상 강요했다. “상생협력기금 조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기금이 국산 농수산물 소비 활성화와 농어업 경쟁력 제고에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던 대책위의 성명이 등 떠밀려 나왔다는 얘기다. “개별 FTA에서 이러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메가 TPP에서는 또 얼마를 내야 하느냐”는 푸념이 벌써부터 들려온다.

한·중 FTA 대가로 농어촌상생기금 조성
청년희망펀드·창조혁신센터도 기업 몫
증세 안 하며 생색내려는 여야 합작품

 협력기금에 대해 정부는 “강제 납부가 아닌 자율적 기부금”이라고 애써 강조한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정부의 정책 결정권은 여전히 막강하다. 정부의 눈치를 거스르며 살아남을 기업은 한국에 별로 없다. 협력기금은 앞으로 FTA로 얻는 이익과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내야 하는 또 다른 준조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비슷한 준조세가 최근 몇 년 새 남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청년희망펀드엔 10여 개 대기업이 수십억~수백억원씩 모두 1000억원을 냈다. 시·도별로 만들어진 창조혁신센터는 15개 기업이 수백억원의 비용을 들여 운영되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도 대기업들에 수백억원씩을 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겉으로야 자발적인 기부지만 사실상 강제 갹출이다.

 이런 종류의 준조세는 비정상이자 편법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라면 정부가 예산을 편성해 추진해야 옳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증세도 고려할 일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증세는 없다”는 대통령의 말에 단단히 묶여 있다. 그러면서 정부·여당이 은근히 협조를 요청하고 기업이 마지못해 거액의 준조세를 내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 야당도 효과와 효율성을 따지지 않은 채 기업에 부담을 떠넘기며 생색을 내는 게 일상이 됐다.

 결과는 기업 의욕 저하다. 지난해 95개 법정 부담금과 사회보험금을 합친 준조세가 58조6000억원에 달했다. 법인세(42조6000억원)는 물론 연구개발(R&D) 투자액(43조6000억원)보다 많다. 늘어나는 속도도 매출증가율을 앞지른다. “사업 못해 먹겠다”는 기업들의 비명이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다.

 준조세 규모는 앞으로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와 고용에서 기업들의 역할을 강하게 요구하는 전 세계적 흐름 때문이다. 필요성과 효과를 따져 기업 부담을 덜어 주는 고려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은 기업에 불필요한 준조세를 안기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합리성이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도, 사회적 공론화 과정도 없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비정상과 적폐가 또 하나 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