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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슨 피크’에 영감을 준 고딕 참고서 1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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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크림슨 피크’에 영감을 준 고딕 참고서 10

“이것이 고딕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신작 ‘크림슨 피크’(11월 25일 개봉)는 마치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영화엔 관객을 놀라게 하려는 얄팍한 꼼수나 작위적인 반전 트릭 따윈 없다. ‘크림슨 피크’는 정공법의 영화이며, 델 토로 감독의 혈관에 흐르는 ‘고딕의 피’는 크림슨 컬러로 화면을 물들인다. 그렇다면 ‘크림슨 피크’를 만들면서 그가 매혹되었던 참고서는 무엇이었을까. 문학과 회화, 영화를 아우르는 열 개의 ‘고딕 레퍼런스’를 뽑아 봤다.

1. 앤 래드클리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를 준비하면서 ‘고딕학 박사’라도 된 듯하다. 그는 지난 9월 열린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선 이 주제로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할 정도였고, 수많은 인터뷰에서 고딕에 대한 어떤 질문이 나와도 막힘 없이 술술 대답하며 리스트까지 쫙 꿰고 있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 그러면서 그는 ‘크림슨 피크’를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자양분으로 ‘고딕 로맨스’의 전통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이 분야의 마스터인 영국 작가 앤 래드클리프(1764~1823)가 빠질 수 없다.

18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고딕 로맨스’는 초현실적이거나 신비한 것을 주로 다루는데, 델 토로 감독은 “고딕 로맨스는 ‘이성의 시대’에 저항하는 당시의 펑크”였다고 말하기도. ‘크림슨 피크’에서 이디스(미아 바시코프스카)는 “제인 오스틴보다는 메리 셸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데,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1818)도 고딕 로맨스의 대표작 중 하나다. 델 토로 감독은 고딕 로맨스 장르에 대해 “강렬한 러브스토리와 초자연적인 장면 등이 있고, 이런 요소들이 결합해 아름답고 멋진 비주얼로 만들어진다”고 쉽게 풀어 설명한다. 래드클리프의 소설에서 델 토로 감독이 언급하는 작품은 『우돌포의 미스터리』(1794). 낯선 공간에서 펼쳐지는 어두운 열정의 이야기다. 한편 래드클리프는 악몽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자기 전에 아편을 피우거나 과식을 했고, 햇빛에 알레르기가 있었던 기이한 작가다.

 
2. 『사일러스 아저씨』

아일랜드 작가 조셉 토머스 셰리던 레 파뉴가 1865년에 내놓은 소설로, 10대인 여주인공 모드 루딘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삼촌인 사일러스의 저택에서 살게 된다. 모드는 사일러스를 살인자라고 의심하는 상태. 한편 사일러스는 자신의 아들과 모드를 근친결혼시키려 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공포와 초자연적 존재가 출몰하는 소설로, 델 토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가 이 소설의 분위기에 근접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그는 “모든 사악함과 공포와 고딕 로맨스의 정서가 집약된 작품”이라고 평한다.

  
3.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레베카』(1938)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델 토로 감독에게 영감을 준 텍스트는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이 영화화한 ‘레베카’(1940)다. 비밀이 숨겨져 있는 대저택,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어둡고 우울한 남편, 미스터리에 빠져드는 순진하고 어린 아내 등 고딕 로맨스의 모든 특징들을 지닌 작품. 여기서 델 토로는 루실(제시카 차스테인)의 캐릭터를 만들면서, 히치콕 감독이 만들어 낸 댄버스 부인(주디스 앤더슨)을 모델로 삼았다. 히치콕 감독은 댄버스 부인이 등장할 때 마치 그림자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매우 느리고 미묘하게 연출했는데, 이 느낌이 델 토로 감독에게 영감을 준 것. 댄버스 부인이 지닌 묘한 성(性)적 긴장감도 영향을 줬다.

  
4. 브론테 자매

델 토로 감독은 미국 온라인 매거진 ‘루키’와 인터뷰하며 레퍼런스가 된 고딕 로맨스를 언급했다. 앞에서 언급한 『우돌포의 미스터리』와 『사일러스 아저씨』 외에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1898),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의 『몽크』(1796), 에드가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1839) 등이 있는데 이 목록의 중심은 브론테 자매의 두 작품이다. 바로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1847)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

델 토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에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로체스터의 대사를 아예 그대로 베껴 왔다고 고백하며, 이 소설이 없었으면 『레베카』 같은 작품도 나오지 못했을 거라고 평가한다. 브론테 세 자매 중에 델 토로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에밀리 브론테다. 그녀의 유일한 소설인 『폭풍의 언덕』의 ‘광적인 사랑’은 고딕 로맨스의 필수 조건이다. 출몰하는 유령의 모티브는 당연히 ‘크림슨 피크’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5. 그림쇼와 터너

최근 델 토로는 자신의 트위터에 “존 앳킨스 그림쇼와 윌리엄 터너는 빛의 장인들. ‘크림슨 피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 그는 영화의 모든 장면을 ‘움직이는 회화’처럼 만들고 싶었고, 세트와 의상과 카메라 워크까지 모두 회회적 톤과 구도로 맞춰 나갔다. 특히 조명은 ‘크림슨 피크’에서 가장 핵심적인 비주얼. 그는 영국의 낭만파 풍경 화가 윌리엄 터너와, 빅토리아 시기의 아티스트 존 앳킨슨 그림쇼의 회화를 레퍼런스로 삼았다.

   
6.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터너와 그림쇼만으론 부족했다. 델 토로 감독은 고딕 로맨스 특유의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고 폐허에 가까운 미장센을 만들어야 했고, 여기서 독일 낭만주의 시대 화가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참조한다. 미국 대중문화 잡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델 토로 감독은 “그의 그림은 무엇인가를 자꾸 환기시키고 어떤 분위기로 가득 차 있으며, 고딕 로맨스는 상실과 우울의 강력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프리드리히는 음울한 시적 감각으로 폐허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7. 고딕 리바이벌

18세기 영국 귀족들 사이엔 교외에 고딕 스타일의 별장을 짓는 유행이 있었고, 19세기가 되자 유행을 넘어 하나의 건축 양식으로 자리잡는다. 바로 ‘고딕 리바이벌’인데, 델 토로 감독은 ‘크림슨 피크’의 저택 ‘알러데일 홀이 중세와 낭만주의 시대를 토대로 고딕 리바이벌의 화려함을 결합했다고 설명한다. 두 사람이 사는 저택이면서도 4층의 높은 건물로 지은 건 향후 보수 비용 같은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과시욕. 천장 부분에 구멍이 뚫려 눈이 그대로 집 안까지 들어오는 건 그런 이유다.

8. 마리오 바바

델 토로 감독이 ‘크림슨 피크’에서 궁극적으로 원했던 톤은, 이탈리아의 호러 장르 ‘지알로’의 창시자인 마리오 바바의 화려하고 과감한 비주얼이었다. 1960년대 당시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컬러와 카메라워크는 파격적인 화려함이었고, 특히 테크니컬러로 제작된 영화의 톤은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녔다. 세트의 완성도도 델 토로 감독이 바바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 그는 ‘크림슨 피크’의 세트에 대해 “지금까지 작업했던 모든 영화를 통틀어 최고”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나는 ‘크림슨 피크’가 마리오 바바 감독의 테크니컬러 영화처럼 보였으면 좋겠다.” 델 토로 감독의 소망이다.

 
9. ‘공포의 대저택’

거대한 저택을 배경으로 화려한 카메라워크를 구사했던 잭 클레이튼 감독의 호러 ‘공포의 대저택’(1961)도 레퍼런스 중 하나였다. 특히 여주인공 데보라 커의 모습은 이디스 캐릭터에 적잖이 반영되어 있다.

 
10. ‘레오파드’

‘고딕 레퍼런스’는 아니지만, 이디스와 토마스(톰 히들스턴)가 왈츠를 추는 장면을 위해 델 토로 감독은 ‘레오파드’(1963,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를 참조했다.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긴 댄스 파티신일 것”이라는 델 토로 감독은, 화려한 색감에도 매혹되었지만 이 신이 플롯 진행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점에 더 주목했고 자신의 영화에도 반영했다. 이디스의 아버지(짐 비버)는 왜 토마스를 싫어하기 시작할까. ‘크림슨 피크’의 궁금증은 바로 이 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델 토로 감독은 ‘데이즈드’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참조한 영화들의 목록을 공개했는데 다음과 같다. ‘공포의 대저택’, ‘제인 에어’(1943,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 ‘레베카’ ‘레오파드’ ‘배리 린든’(1975, 스탠리 큐브릭 감독), ‘킬 베이비, 킬’(1966, 마리오 바바 감독), ‘더 체인질링’(1980, 피터 메닥 감독), ‘순수의 시대’(1993,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위대한 유산’(1946, 데이비드 린 감독) 그리고 영국 해머 필름 호러의 거장 테렌스 피셔 감독의 ‘늑대인간의 저주’(1961). 한편 피셔의 드라큘라 무비로 유명한 배우 피터 쿠싱은 ‘크림슨 피크’의 주인공 이디스 쿠싱과 성이 같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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