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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그 누구에게도 소방관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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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뛰는 소방관들

화재와 사고 현장에 출동하기 수천 번. 적어도 수십 번은 불길을 뚫고 인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작스레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누구는 머리가 깨질 듯, 누구는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습니다. 원래는 건강하던 몸. ‘그저 그러려니, 얼마 지나면 나으려니’ 했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통증을 견디다 못해 찾아간 병원에서는 백혈병ㆍ혈액암 판정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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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연금공단의 불승인통지서

 의사는“화재 현장에서 유독 가스를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고 했습니다. 치료에 든 돈은 수천만원, 때론 1억원이 넘었습니다. 보상을 받으려고 공무원연금공단에 ‘공무 중 부상(공상)’ 승인 신청을 냈습니다. 승인받으면 치료비와 약값을 전부 지원받을 수 있으니까요. “유독 가스 때문”이라는 의사의 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불승인”이라는 A4 용지 두 장짜리 통지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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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현장을 누볐던 몸은 한폭 침대에 갇혔다. 소방관의 질병은 유독가스를 들이마셔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병을 앓은 가족이 없고, 몸은 튼튼했으며, 술ㆍ담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백혈병ㆍ혈액암 등에 걸린 소방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 “불이 났을 때 발생하는 다양한 발암성 유해물질에 노출됐다. 발병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는 대법원 판결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은 2008년을 마지막으로 단 한 차례도 공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화마(火魔)와 싸우다 병을 얻은 소방관들은 그래서 또다시 싸우고 있습니다. 공상을 인정받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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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성골수종으로 병상에 누운 이성찬(47) 전 지방소방장

   병원에서 다발성골수종(혈액암의 일종)으로 투병 중인 이성찬(47) 전 지방소방장이 그렇습니다. 소방관이 된 지 16년되던 2011년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병 치료에 전념하려 2013년 11월 퇴직했습니다. 지금까지 수술비와 치료비ㆍ약값으로 1억5000만원을 썼습니다. 올 3월 공무원연금공단에 공상 신청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No’였습니다. 그 뒤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번개탄을 샀다가 어머니 전화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지금은 치료를 하면서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공상을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료ㆍ후배 소방관들이 나 같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송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남 목포소방서 연산119안전센터의 오영택(42) 소방위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앓고 있습니다. 올 3월 처음 증상을 느꼈고, 현재 항암치료 중입니다. 지금은 대화하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입니다.
  오 소방위는 갑상샘암을 앓아 치료받은 경력이 있습니다. 그를 진료한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장태원(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백혈병은 갑상샘암과 관계 없어 보인다. 20년 넘게 화재 진압 업무를 했고, 화재 현장에서는 수많은 유독 물질이 배출되니 만큼 업무와 관련 있어 보인다.”
 의사는 그랬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은 공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연금공단이 외면한 그를 돕고자 동료들이 500여만원을 모았습니다.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소송도 생각했지만…, 우선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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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성골수종에 걸린 김기서(62)씨

  2013년 6월 퇴직할 때까지 33년간 1700번 넘게 출동했습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는 10일간 캄캄한 붕괴 현장을 누비며 생존자를 찾았습니다. 그랬던 김기서(62)씨는 지금 “1년 이상 살기 힘들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2009년 혈액암(다발성골수종)으로 수술받고 업무에 복귀했습니다. 병은 2년 뒤 재발했습니다. 이듬해인 2012년 공상 신청을 했습니다. “장기간 소방관으로 근무하며 유해물질을 반복적으로 흡입한 것이 (발병의)직접적인 원인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주치의 소견서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헛수고였습니다.
  얼마 전 의료진은 “마지막 치료 방법”이라며 신약을 권했습니다. 약값은 한 달에 2000만원. 포기했답니다. 김씨는 “공상 불승인 통보를 받았을 때 소송을 낼까 생각했지만 변호사 비용 부담 때문에 하지 않았다”며 “그 때 소송을 내지 않은 게 후회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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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근(59) 전 지방소방경이 받은 표창장은 빛이 바래간다. 약봉지가 그의 지금 처지를 말해준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비롯해 1만3320회 출동했던 이실근(59) 전 지방소방경은 지금 ‘소뇌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해병대 출신에 100m를 12초에 달리던 그였건만, 소뇌가 점점 작아져 이젠 걸음도 잘 걷지 못합니다. 지난해 공상 신청 퇴짜를 맞은 그는 소송을 냈습니다. “이 소송은 후배를 위한 싸움”이라며 거실 벽에 걸린 제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촉촉했습니다.
  강원 춘천소방서 화천119안전센터 이동규(50) 소방위는 2011년 코와 목구멍 사이(비인강)에 암이 생겼습니다. 8개월 치료 뒤 복귀했습니다만, 지금 후유증으로 얼굴 뼈 조직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애초 암이 생겼을 때, 그는 공상 승인 신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위를 보니 어차피 승인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치료비 5000만원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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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인 소방관 중 유일하게 공상을 인정받은 손영건(46) 지방소방장

 2008년 이후 백혈병 등으로 공상 인정을 받은 소방관은 단 한 명. 부산 금정소방서 서동119안전센터 손영건(46) 지방소방장입니다. 급성 백혈병으로 도지는 ‘골수이형성증후군’에 걸려 공상 신청을 했으나 2011년 거절당했습니다. 혼자 도전한 1심에선 졌고, 변호사의 도움을 얻어 지난해 6월 공상을 최종 인정받았습니다. 대법원은 “손씨가 화재 시 발생하는 다양한 발암성 유해물질에 노출됐고, 골수이형성증후군 발병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는 서울고법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최종 승소한 손 소방장은 “소송을 하면서 과거 화재 현장에서 들이마신 연기가 가슴 속에서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대법원 판결을 요약하자면, “건강하고 가족에 병이 없는 소방관이 오랜 동안 화재 현장에 출동했을 경우 백혈병 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은 여전히 백혈병이나 혈액암을 앓는 소방관들의 공상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통지서를 통해 “해당 질병은 발병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공무에 기인한 질병으로 추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통지서엔 간단한 행정소송 안내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송을 하는 소방관은 일부입니다. 당장 병 치료가 급하고, 변호사 비용 대기도 막막해서입니다. 소방본부의 도움도 없습니다. 한 지방 소방본부 관계자는 “공상 관련 소송은 조직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라기보다 개인 영역에 가깝다”며 “공단에서 불승인한 공상 문제를 소방 조직 차원에서 법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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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목숨을 건 노고와 그때문에 얻은 질병…언제쯤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선진국은 다릅니다. 미국은 처음 신체검사 때 이상이 없었던 소방관이 일정기간 이상 근무한 뒤 백혈병ㆍ혈액암에 걸리면 공상으로 인정합니다. 화재 현장에서 벤젠 같은 발암물질에 많이 노출되면 백혈병 등에 걸릴 수 있다는 의학 연구를 바탕으로 한 규정입니다.
  앨러배마ㆍ펜실베이니아주는 이뿐 아니라 “다른 이유로 발병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직업병을 인정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소방관 업무로 인해 병이 났다는 걸 소방관 스스로 증명해야하는 우리나라와는 거꾸로 입니다. 이런 미국 상황은 우리나라 소방관들에게 그야말로 남의 나라 얘기입니다. 화마와 싸우는 소방관들이 병마와 싸우고 또다시 공무원연금공단과 싸워야하는 나라. 2015년 대한민국입니다.

특별취재팀=차상은(팀장)ㆍ박수철ㆍ김윤호ㆍ강태우ㆍ김호 기자, jTBC 구석찬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ㆍ프리랜서 공정식, 영상취재 강태우
편집ㆍ디자인=정혁준ㆍ심정보ㆍ임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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