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을 초대하는 마음으로, 브랜드 체험 공간 꾸며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5호 20면

2 바리스타들이 커피를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구성한 스타벅스의 컨셉트 스토어. [사진 스타벅스]

1 아마존이 시애틀 대학교 근처에 오픈한 오프라인 서점.

영화 ‘그녀(Her)’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지적이고 위트 있는 사만다와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 여행을 떠가는가 하면 동료 커플과 더블 데이트도 즐긴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는 뺨을 맞대고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인간 사만다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시공을 초월한 공간이 존재하고, 실체 없는 소프트웨어와 인간의 간극은 점점 커져간다.


지난 3일 아마존은 시애틀 워싱턴대학 근교에 오프라인 서점을 오픈했다. 북스토어 담당 부사장 제니퍼 캐스트의 표현을 옮기자면 ‘아마존닷컴의 물리적 확장(a physical extension of Amazon.com)’이다. 고도의 기술로 고객 개개인에게 최적의 맞춤 서비스를 제공해 온 가상의 존재가 물질계로 이동한 것이다. 사만다에게 육체가 주어진 셈이다. 수많은 서점을 폐점시키며 비난을 샀던 아마존이 오프라인으로 진출한 의도는 무엇일까?


오프라인 매장엔 예상 못한 즐거움 존재아마존의 대표 상품 킨들의 매출은 2012년 이후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판매량이 전년대비 70%나 줄었다. 시애틀 매장은 e북(ebook)에 익숙하지 않거나 킨들 구매를 주저하던 소비자들에게 확신을 주고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체험공간이 될 수 있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경험은 계획하지 않았던 구매를 일으킬 가능성도 크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채널을 연계한 O2O 효과도 기대된다. 아마존닷컴에서 주문한 책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픽업하거나 오프라인 매장에서 본 책을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식이다. 실제로 아마존 서점에 진열된 책에는 가격이 표시돼 있지 않다. 대신 바코드 스캐너로 스캔하면 아마존닷컴에서 판매되는 가격이 나타난다. 직원들도 매장에서 둘러보고 구매는 온라인에서 하는 쇼루밍(showrooming)을 권장한다.


여러 해석의 밑바탕에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밀레니얼(Millennial) 세대의 아이러니한 소비 성향이 존재한다. 출판업계 전문 컨설팅업체 퍼블리싱 테크놀로지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밀레니얼 소비자의 52%는 직접 서점을 방문해 서적을 훑어본 후 구매를 결정한다. 인터넷, 모바일 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이들이지만, 79%는 여전히 종이책을 선호해 2014년 2학기 대학 교재가 e북으로 판매된 비중은 9%에 머물렀다.

4 제주도 바닷가에 위치한 동서식품의 팝업스토어 ‘모카다방’.

밀레니얼 소비자들에게 서점은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곳이 아니라 여가와 사교의 장소다. 진열대에서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는 소소한 즐거움, 저자와의 대화, 독서모임 같은 이벤트의 매력에 빠진 젊은이들도 많다. 지속적으로 감소하던 미국의 인디 서점 수는 2014년 1600여 개에서 2015년 2200개 이상으로 급증했다. 한국에서도 책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독특한 이벤트가 있는 서점을 선호한다는 독자들이 늘고 있다. 카페와 서점을 결합하며 저자 강연회, 문화강좌 등 다양한 이벤트로 차별화한 ‘북티크(Booktique)’같은 서점도 인기다.


독서량이 많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예술, 사진 관련 서적을 매주 한권씩 선정해 책과 작품들을 전시하고 저자, 제작자와 만남을 주선하는 ‘한권 밖에 팔지 않는 책방(一冊の本しか?らない本屋さん)’도 등장했다. 디지털 상품으로 형태를 잃어가던 책과 서점이 현실세계에서 만남과 교제의 매개체로 부활한 것이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아마존이 아날로그 감성을 중시하는 고객들과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는 장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6 서울 홍대에 있는 브랜드 체험공간 ‘모나미 컨셉트 스토어’.

IT 공룡 구글의 행보도 유사하다. 지난 3월 런던에 개장한 구글샵은 안드로이드 폰, 크롬북, 크롬캐스트 전시관은 물론 디지털 스프레이로 자신만의 구글 로고를 디자인하거나 대형 스크린에 구글 지도를 띄워 세계 어디든 가상 여행을 할 수 있는 체험 공간으로 꾸며졌다. 최첨단 기기의 작동 원리, 온라인 보안 등을 주제로 한 다양한 강좌, 어린이 캠프도 열린다.


매장의 역할이 상품이 이동하는 기능적 통로에서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자 전통 제조업체들도 공간 브랜딩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얼마 전 동서식품은 제주도 한적한 바닷가에 팝업 스토어 ‘모카다방’을 열었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을 자신의 공간에서 직접 전달한다는 취지다. 서교동에 위치한 문구 브랜드 모나미의 컨셉트 스토어는 펜과 종이에 얽힌 역사와 스토리를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곳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5 일본 도쿄에 있는 킷캣 컨셉트 스토어 ‘더 초콜라토리’.

컨셉트 스토어는 고객 관찰 실험실컨셉트 스토어는 중간 유통업체의 가림막 없이 고객의 반응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실험실이 되기도 한다. 2014년 네슬레가 일본 동경에 선보인 킷캣 컨셉트 스토어 ‘더 초콜라토리(The Chocolatory)’는 소중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선물로 프리미엄 초콜릿을 제안하고 ‘사쿠라 그린티 초콜릿’처럼 일본 초콜라티에와 함께 만든 한정판 상품을 판매한다. 때때로 ‘구운 킷캣을 토핑으로 올린 소프트 아이스크림’같은 실험적인 메뉴도 등장한다.


건축물의 외관, 인테리어 디자인과 구성물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전파하는 공간 브랜딩(Space Branding)은 예술, 문화 공간으로도 확장된다. 최근 개관한 루이비통 뮤지엄, 프라다 미술관은 브랜드 전통과 예술성을 알리는 홍보관인 동시에 신진 예술가들의 실험실이자 기업이 소장한 컬렉션을 대중들과 공유하는 공익적 공간,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지향하는 현대카드의 경우 디자인, 트래블, 뮤직 라이브러리를 통해 예술과 문화에 대한 기업의 태도와 철학, 감성을 표출한다.

3 현대카드가 서울 이태원에 문을 연 뮤직 라이브러리.

공간은 기업의 비전과 경쟁력, 전략적 변화를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핵심 매체이기도 하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경험하는 감각적 자극들은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백 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이다.


2011년 로고 변경과 함께 커피 이외 사업으로의 다각화를 선포한 스타벅스는 매장 전략에서도 다양화, 현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전 세계 매장의 분위기를 통일시키는 전략은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커피 업계의 맥도날드’가 되어가는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역의 스토리와 특성을 활용하면서도 스타벅스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변화의 신호탄은 2012년 암스테르담 렘브란트 광장에 오픈한 첫 컨셉트 스토어였다. 17세기 커피 무역상들이 이용하던 은행의 금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더 뱅크(The Bank)’라는 이름을 붙였다. 낡은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면과 대리석 타일,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과 풍차를 새긴 장식은 공간이 지닌 스토리를 보여준다. 천정의 나무 장식은 네덜란드 오크를 1876개 조각으로 잘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스타벅스는 이후 덴버에 조립식 컨테이너를 재활용한 매장을 소개했고, 뉴올리언즈 매장에는 재즈 악기로 장식한 샹들리에를 매달아 도시의 개성을 강조했다. 최근에는 동네의 작은 카페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자 고객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커피 장인(coffee artisan)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컨셉트 스토어를 선보였다. 지난 9월 오픈한 런던 코벤트 가든 매장을 방문하면 입구에서 기다리는 직원이 따뜻한 인사말을 건네며 그 자리에서 주문을 받는다. 메뉴에는 일반 커피는 물론 스파클링 민트 에스프레소 같은 프리미엄 커피, 와인과 수제맥주, 간단한 식사도 포함되어 있다. 안내된 자리에 앉으면 오픈 키친에서 바리스타들이 화학실험을 하듯 진지하게 커피를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다양한 메뉴와 볼 거리로 가득 찬 스타벅스의 컨셉트 스토어는 ‘커피 극장(coffee theatre)’이라 불리곤 한다.


브랜드의 내면 이해하면 관계 깊어져인터넷 쇼핑, SNS 소통이 대세라 해도 고객과 직접 만나는 공간의 중요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상세계에서 전달할 수 없는 브랜드 매력과 기업의 메시지를 풍부하게 보여주는 물리적 공간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디지털 시대에는 큰 공간에 많은 상품을 진열하는 양적 전략은 의미가 없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공간도 경이로움을 줄지언정 깊은 공감을 이끌어내기엔 부족하다. 구석구석 기업과 경영자의 경영철학, 의지가 묻어나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스토어를 론칭할 때 화장실 표지판에 입힐 회색 색조를 결정하기 위해 30분 간 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애플 스토어는 완벽과 디테일에 집착하는 브랜드 성격을 대변하는 곳이 되었다. 누군가의 공간에서 크고 작은 물건들, 색상과 소리, 향기를 접할 때 그동안 몰랐던 그의 내면을 이해하게 되고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좋아하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할 때의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고객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schoi@dongd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