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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계 거꾸로 돌린 명분 없는 쿠데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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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1 면

세종 시절 김종서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하류에 6진을 설치했으나 수양에게 살해됐다.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답게 그는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중략)…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는 시를 남겼다. 김종서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는지 달(단종을 상징)을 향해 울부짖고 소나무(유학자 그룹)는 달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다.


【총평】


명분은 때로 실용보다 중요하다.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힘이 명분보다 우윙 있다고 생각하는 리더가 많을수록 사회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수양은 명분이 없어도 힘만 있으면 국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통해 확립한 유교적 가치관을 뒤집었다. 유학자들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권은 잡았지만 온갖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세조를 축출하려는 시도가 잇따랐고, 유학자들이 출사를 거부하는 등 숱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다.


세종 이후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정치적 권한이 넘어가자, 수양 대군이 정변(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통치 체제를 다시 6조 직계제로 고치고, 언관의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집현전을 폐지했다. 또한 경연을 열지 않았으며,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세조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경국대전은 세조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16년(1485)에 완성했다. 조선 초기 “경제육전”과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다. 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조선의 토지 제도는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관리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과전법에 따라 전.현직 관리는 경기 지방의 토지를 과전으로 받았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혼하지 않은 부인에게는 수신전, 20세 미만의 자녀에게는 휼양전이라는 명목으로 과전 가운데 일부를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도록 했다.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린 공신전도 세습을 허용했다. 현직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세조 때는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했다. 직전법 시행 이후 관리들이 농민에게 조세를 과다하게 거두는 일이 빈번해지자, 성종 때는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어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를 시행했다.


지방의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은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였고, 군현은 집집마다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생산량이 감소하여 수량을 맞추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구매하여 내기도 하였으므로 공물은 농민에게 전세보다 더 큰 부담을 주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중앙 관청의 서리가 대신 공물을 국가에 내고 그 대가를 비싸게 책정하여 농민에게 받아 내는 방납의 폐단이 나타났다.


조선을 건국한 혁명파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중앙 관직을 차지하면서 중앙 집권과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통치 체계를 정비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을 관학파라 하는데, 관학파는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에도 포용적인 자세를 보였으며, 기술을 중시하고 시와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관학파는 세조 이후 훈구파로 불렸다. 훈구파는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대농장을 소유하고 부유한 생활을 했다. 사림은 지방의 중소 지주로서 훈구파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했다.


성리학은 조선 건국의 사상적 바탕이자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였다. 그래서 조선 건국 이후 성리학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 원리로서 강조되었다. 정부는 성리학적 규범을 널리 확산하기 위해 윤리와 의례에 관한 책을 활발하게 편찬했다.


성리학이 국가 주도 이념이 되면서 불교 비롯한 다른 사상은 크게 위축되었다. 건국 직후부터 불교 사원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 회수하는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도첩제의 실시로 승려의 수가 제한되었다. 세종 때에는 모든 종파를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했다. 하지만 궁중과 민간에서는 여전히 불교 신봉하였으며 왕실의 안녕 기원하고 왕족의 명복 비는 행사가 자주 시행되었다. 세조는 사찰과 승려에 대해서는 억압 정책을 폈으나, 불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행사를 통해 명맥을 유지했다. 세조 때에는 원각사에 탑을 세우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 간행하는 등 불교가 일시적으로 중흥의 기회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림의 비판으로 불교의 사회적 위상은 크게 약화되었다.


국가의 지방 통치를 원활하게 하고 국방의 필요성 커지면서 지리에 대한 연구와 편찬 사업도 활발했다. 세조 때 완성한 동국지도는 인지의 등 과학 기구를 이용하여 만든 최초의 실측 지도이다. 15세기에는 궁궐과 관아, 성문, 학교 등이 건축의 중심을 이루었다. 불교 건축물 중에서도 뛰어난 것이 있었다.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당시의 과학과 기술이 집약되어 만들어졌고, 세조 때에 대리석으로 만든 사리탑인 서울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15세기에 그려진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는 성리학 외에 도교와 노장사상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산수나 인물을 표현하였다. 화원 출신인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대각선 구도를 활용하여 자연스러운 현실 세계와 환상적인 이상 세계를 나타낸 걸작이다. 양반 관리였던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과감한 필치로 인물의 내면세계를 묘사했다. 서예에서는 안평 대군이 송설체(조맹부 체)로 유명했다.


조선은 건국 직후 진취적인 자세로 영토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태조 때 정도전이 요동 지역을 회복하려는 요동 정벌 계획을 추진하여 명과 갈등을 빚었지만, 태종 이후에는 조선과 명의 관계가 안정되고 문화 교류가 활발했다. 태종은 요동 정벌을 포기한 대신에 충청, 전라, 경상도의 주민들을 평안도와 함경도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했다. 세종 때에는 압록강 지역에 최윤덕을 파견하여 4군을 설치하고, 두만강 지역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6진을 설치하면서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삼남 지방의 주민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민 정책은 성종 때까지 이어져 남쪽의 많은 주민이 북방으로 이주했다.


조선 외교는 사대교린을 원칙으로 추진되었다.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명에 대해서는 큰 나라이자 문명국 섬긴다는 ‘사대’를 원칙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여진과 일본 등에 대한 외교는 이웃과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교린’을 원칙으로 삼았다.


명과 평화적 관계를 맺는 것은 조선의 안정과 번영에 중요한 일이었다. 조선은 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했으나, 명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다. 조선과 명은 책봉과 조공이라는 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책봉은 형식일 뿐 내정 간섭이나 종속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명과 매년 사절을 교환하면서 활발하게 교류했다. 사절 교환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조선은 이를 통해 명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고 물품을 교역하였다. 조선은 조공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안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경제적으로도 실리를 챙겼다. 명과의 사대 외교는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으며 당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다.


조선은 여진과 일본에 대하여 강온 양면 정책을 펼쳤다.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책과 강경책을 함께 쓰는 교린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일본에 대해서도 토벌과 회유의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핵심 키워드】


☞ 수양 대군이 정변([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해 통치 체제를 다시 6조 직계제로 고쳤다. 또한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했다. 세조는 국가의 통치 체제 확립을 위해 “[경국대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과전법]에 따라 전.현직 관리는 경기 지방의 토지를 과전으로 받았는데,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수신전], [휼양전], [공신전] 세습으로 인하여 현직 관리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세조 때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했다. 직전법 시행 이후 관리들이 농민에게 조세를 과다하게 거두는 일이 빈번해지자, 성종 때는 국가에서 조세를 거두어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를 시행했다.


지방의 토산물을 거두는 [공납]은 중앙 관청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였고, 군현은 집집마다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중앙 관청의 서리가 대신 공물을 국가에 내고 그 대가를 비싸게 책정하여 농민에게 받아 내는 [방납]의 폐단이 나타났다.


[성리학]은 조선 건국의 사상적 바탕이자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였다.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경계로 하는 국경선을 확정했다. 조선은 남부 지방의 일부 주민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 실시했다.


조선 외교는 [사대교린] 원칙으로 추진되었다. 명에 대해서는 ‘[사대]’를 원칙으로 외교 관계 맺었다. 여진과 일본 등에 대한 외교는 ‘[교린]’을 원칙으로 삼았다. ☜


【예상 문제】


1.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호조 판서 서거정이 (가)을/를 바치면서, “우리나라에 교지나 옛 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서로 모순되고 앞뒤가 맞지 않아 나라의 기본이 되는 법이 하나로 정해지지 못한 실정이었습니다. 선왕대로부터 이들을 모두 한 곳으로 모아 만대에 이어질 법을 만들기 시작하여 마침내 6전 체제로 완성하였으니, 이로써 왕조의 근본을 새롭게 세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보기]

ㄱ. 오례의 예법과 의식 절차를 체계화하였다.

ㄴ. 유교적 통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편찬하였다.

ㄷ. 백성 교화를 위해 충신과 열녀의 사례를 정리하였다.

ㄹ. 세조 때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에 마무리하였다.


① ㄱ, ㄴ ? ?② ㄱ, ㄷ ? ??③ ㄴ, ㄷ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14학년도 수능예비시행 11번


2.(가)~(다)에 대한 옳은 설명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과전법의 시행과 변화 -


구분

내용


과전법


? 경기 지역 토지에 한하여 관리에게 수조권 지급


? 관리의 유가족에게 (가)와/과 휼양전 지급


(나)


?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 지급


? 시행 과정에서 (다) 도입 : 관청에서 수조를 대행하여 관리에게 지급

[보기]

ㄱ. (가)는 과전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ㄴ. (나)에서는 경기 이외 지역의 토지도 지급되었다.

ㄷ. (다)는 양반 관리들의 과다한 수취를 시정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ㄹ. (나)의 시행 시기에도 (가)는 계속 지급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 ?⑤ ㄷ, ㄹ

* 2013학년도 6월 모의 평가 8번


3.?다음 건의가 있었던 시기의 경제 상황으로 옳은 것은?


근래에 전하께서 수신전과 휼양전을 없애시어 관리가 죽으면 그 처자의 생계가 막연해 졌습니다. 그리하여 과부는 수절하지 못하고 고아는 효도를 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선왕의 옛 제도를 회복하시어 절의를 지키고 외로운 자를 부양할 수 있도록 하소서.


① 세금과 소작료를 동전으로 납부하는 추세가 확산되었다.


②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생활 대책으로 구분전이 지급되었다.


③ 관직에서 물러난 관리는 국가에 수조권을 반환하여야 했다.


④ 영정법 시행으로 풍흉에 관계 없이 1결당 전세가 고정되었다.


⑤ 관리의 관직 복무에 대해 국가가 지급하는 대가로 녹봉만 남았다.

* 2011학년도 9월 모의 평가 15번


4. ?다음 모의가 성사되어 왕이 바뀌었다. 새 왕에 의해 기능이 약화된 정치 기구를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보기]

ㄱ. 6조 ? ?ㄴ. 의정부 ? ?ㄷ. 사간원 ? ?ㄹ. 승정원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06학년도 수능 5번


5. ??다음은 조선의 정치 운영과 관련된 자료이다. 이로 인하여 나타날 변화를 적절하게 추론하고 있는 사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상왕(단종)이 나이가 어려 무릇 조치하는 바를 모두 의정부 대신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지금 내(세조)가 왕통을 계승하여 국가의 모든 일을 처리하며 우리나라의 옛 제도를 복구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6조가 각각 그 직무를 담당하여 직계한다.

-세조실록-

[보기]

갑송: 집현전의 활동이 더욱 중시되었을 거야.

을주: 의정부 대신들의 활동이 견제되었을 거야.

병철: 의금부나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을 것 같아.

정순: 향약 보급으로 지방 사회가 안정되었을 것 같다.


① 갑송, 을주


② 갑송, 병철


③ 병철, 정순


④ 을주, 정순


⑤ 을주, 병철

* 2005학년도 9월 모의평가 12번


6. ?조선 시대 토지 제도의 변천 과정이다. (가)의 조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과전법 시행 ? ? ?→ ? ?직전법 실시 ? ? → ? ? ?(가) 실시 ? ? ?→ ? ? ?직전법 폐지


① 전직 관리에게도 토지를 지급하였다.


② 토지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이 약화되었다.


③ 수신전, 휼양전 등의 명목으로 토지의 세습이 이루어졌다.


④ 지조 전호제가 사라져 농민들의 생활이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⑤ 관료들이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이 사라졌다.

* 2005학년도 6월 모의평가 7번


7.?다음 잘에 나타난 영토 확장과 관련된 지도로 옳은 것은?


왕이 옛 땅을 되찾기로 하여 땅이 넓고 기름지며 군사적 요충지인 경원부 북쪽 회질가에 성을 쌓았다. 아울러 삼남지방의 일부 주민을 이주시키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였다.

* 2012학년도 수능 3번


8.?지도의 A~D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 A는 조선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확정한 국경선이다.

ㄴ. ? B는 신라 진흥왕이 북쪽으로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을 때의 경계선이다.

ㄷ. ? C는 고려 공민왕이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했을 때의 국경선이다.

ㄹ. ? D는 신라가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룩했을 때의 경계선이다.


① ㄱ, ㄴ ? ?② ㄱ, ㄷ ? ?③ ㄴ, ㄷ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09학년도 수능 18번


9.?다음 밑줄 친 ‘이 지역’에 대한 정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이 지역은 본래 우리 땅이었는데, 중간에 여진족에게 점거되었다. 태조가 이 지역에 처음으로 부를 설치하였다. 태종 때 야인이 침입해 와서 백성들을 경성군으로 옮기고 그 땅은 비워 두었다. 세종 때 이 지역을 되찾기로 하고 정벌하여 회복하였다.

[보기]

ㄱ. ?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였다.

ㄴ. ? 조세 운반을 위하여 조창을 설치하였다.

ㄷ. ? 무역소를 설치하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ㄹ. ?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① ㄱ, ㄴ ? ?② ㄱ, ㄷ ? ?③ ㄴ, ㄷ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06학년도 수능 11번


10.?조선 전기에 (가)~(라)와 가진 대외 관계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보기]

(가) : 왕권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실리 외교를 추구하였다.

(나) : 회유와 토벌의 양면 저책을 취하였다.

(다) : 쓰시마 섬 토벌 이후 임진왜란까지 국교가 단절되었다.

(라) :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① (가), (나) ? ?② (가), (다) ? ?③ (나), (다) ? ?④ (나), (라) ? ?⑤ (다), (라)

* 2006학년도 모의평가 7번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④
ㄴ.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 제도를 성문화한 것으로, 법전에 근거한 합리적인 국가 운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ㄹ.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호전과 형전이 완성되고 예종 때 6전이 모두 완성되었으나, 반포하고 시행한 왕은 성종이다.

해설 : 정답 ②
(가)는 수신전, (나)는 직전법, (다)는 관수관급제이다.


ㄱ. 수신전은 과전 세습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ㄷ. 관수관급제는 양반 관리들의 과다한 수취 시정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국가가 전체적으로 모두 거두었다가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해설 : 정답 ③
③ 직전법에서는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이 지급되기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수조권을 반납해야 했다.

해설 : 정답 ③
ㄴ. 6조 직계제의 실행으로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ㄷ. 사간원과 사헌부의 언관 활동도 위축되었다.

해설 : 정답 ⑤
을주: 단종 때 의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것을 견제하기 위해 세조는 6조 직계제를 채택했다. 병철: 왕의 특명에 의해 죄인을 다스리던 의금부와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은 왕권의 강화와 유지를 위한 핵심적 기관이었으므로, 6조 직계제의 실시와 함께 강화되었다.

해설 : 정답 ⑤
⑤ 관수관급제의 실시로 양반 관료들의 수조권을 빌미로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지고 국가의 토지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해설 : 정답 ⑤
⑤ 조선은 영토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 위해 여진에 대한 적극적 외교 정책 펼쳤다. 세종 때에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 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삼남 ㅈ방의 일부 주민들을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해설 : 정답 ①
① ㄱ. A는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확정한 국경선이다. ㄴ. B는 진흥왕 시기 영토 확장의 결과로,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통해 알 수 있다.

해설 : 정답 ④
제시된 자료의 ‘이 지역’은 세종 때 개척된 4군과 6진이다.

<오답 풀이>


ㄴ. 이 지역에서 거둔 세금은 모두 자체적으로 썼기 때문에 조운 제도가 실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창 역시 설치되지 않았다.

해설 : 정답 ①
(가)는 명, (나)는 여진, (다)는 일본, (라)는 유구이다.


① (가) 명에 대해 조선은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내정간섭은 없었다.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 실리 외교를 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를 실시하였다. (나) 여진에 대해 조선은 귀순을 장려하고 무역소를 통한 국경 무역을 허용하는 회유책과 4군과 6진의 개척과 국경을 넘어 약탈하는 자에 대해 토벌하는 강경책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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