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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조영래 ① "통일 대한민국의 초대 총리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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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날입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후배 변호사 16명과 함께 25주기 추모사업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의 일환으로 ‘인간 조영래’를 아는 사람 21명을 찾아가 인터뷰했습니다.

21명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조영래

후배 변호사들이 담아온 이야기들 중 지면 보도(11월 7일자)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서울지방변호사회와 인터뷰 대상자들의 동의를 얻어 온라인에 릴레이로 게재합니다. 많은 이야기들 중 조 변호사와 직접 얽힌 부분만을 추렸습니다. 곧 출간될 「조영래, 그의 삶을 이야기하다」(서울지방변호사회 발간)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은 인터뷰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의 기억 영역인 대학교 시절 이전의 이야기는 그래서 빠졌습니다.

◆ 인터뷰 대상(이름순)
김선수(법무법인 시민 대표) 민종덕(전 청계피복노조위원장) 박석운(한국진보연대 대표) 박성민(변호사) 박원순(서울시장) 박인규(프레시안 이사장) 손학규(전 민주당 대표) 신순애(「열세 살 여공의 삶」 저자) 신평(경북대 교수) 안영도(변호사) 이홍훈(전 대법관) 임도빈(법무법인 다온 고문) 장기표(뉴스바로 대표) 전순옥(국회의원) 정영일(변호사) 정향아(전 조영래 변호사 사무원)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 천정배(국회의원) 홍성우(변호사)

◆ "이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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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반대시위 중 가장 유명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현장. 1964년 5월 20일 벌어진 이 시위에서 대학생들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메고 행진했다.

조 변호사는 1964년 경기고등학교 3학년 시절 한ㆍ일 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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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

"조영래 변호사는 고등학교 때도 아주 뛰어났습니다.

아무래도 기억에 남는 건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했을 때죠. 그때 우리가 들고나간 플래카드가 아마 '이것이 한국적 민주주의이더냐?' 였어요.  그것도 조영래 작품일 겁니다. 그 당시 많은 시위가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이렇게 그런 플래카드를 갖고 나왔다고 해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국회(지금의 시의회) 앞으로 해서 시청 앞을 돌아 가두행진을 했습니다. 아직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이던 그때 일본 연락사무소 같은 게 있던 호텔 앞에 가서 시위를 하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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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훈

"조 변호사가 시위를 주도했었죠. 고3이 공부하기도 바쁠 때잖아요.  어떻게 해서 공부하기도 바쁜 학생들을 다 모아서 길가에서 시위를 하도록 했는지. 고등학생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죠. 그 시대에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고, 수많은 학생들이 동참해서 그런 뜻을 표하도록 행동으로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걸 해내더라고요."

◆ "톱은 무슨 톱입니까"

1965년 2월 14일자 조간신문에 실린 서울대 합격자 발표는 이변이었습니다. "최고 득점자 조영래(법학과)ㆍ경기고"

하지만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조영래의 심경은 담담했습니다. "합격했으면 됐지 톱은 무슨 톱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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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훈

"조 변호사는 기본적으로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죠. 사람이 겉보기에는 날카롭지도 않아 보였지만 특별한 면모가 있었어요. 어학도 그렇고 다른 공부도 짧은 시간 내에 놀라운 학업능력을 발휘했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도 했어요. 또 학생시위도 하고 했는데 그런 사람이 공부를 얼마나 했겠어요. 그런데 고3 2학기 때 몇 달 공부해서 서울대학교를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으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사람 머리하고는 좀 다른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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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표

"조영래는 학교 다닐 때는 법 공부는 전혀 안 했어요.  곽윤직 교수라고 있어요. 물권법 학자.  그 사람이 참 유명한 사람이에요. 대꼬챙이였죠. 곽 교수가 조영래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조영래 성적을 보고는 너무너무 실망스러워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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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

"조영래의 지적인 능력, 이거는 정말 대단합니다. 지적인 능력과 필력이 다 같이 가는 건데, 대학교 때 조셉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상당히 새롭고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는데 조영래가 대학교 2, 3학년 때인가 그거를 들고 다니더니 일주일도 안 돼서 다 읽었다는 걸 보고 대단하다 생각했죠."

◆ "통일한국의 초대 수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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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서울대 사회법학회 모임.

입학 직후부터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가담한 조영래는 두 달여 만에 첫 번째 처벌인 '근신 3개월'을 받았습니다. 첫 정학은 2학년 때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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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도빈

"5월에 학생들에 대한 처벌이 있었는데, 다들 제적이나 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때 학교에서 조영래나 임도빈은  1학년이지만 가담 정도가 너무 강하다고 해서 둘 다 제적 대상으로 올려놨습니다. 그런데 조영래가 누굽니까?  전체 수석 합격자인데, 들어오자마자 두 달 만에 제적을 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일 약한 처벌인 근신 3개월을 받았습니다. 저는 조영래 덕을 본 셈이죠.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게 교수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였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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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일

"시국이 참 어수선할 때인데… 그래도 공부만 열심히 하는 고시파들이 있잖아요?  고시파들한테 우리는 완전히 데모꾼이지.  기피 대상인 데모꾼.

조영래를 만나 얘기하고 놀다 올 때마다 ‘야, 역시.  판단력이라든지 집중력이라든지 또는 열정이라든지 식견, 이런 데에서 언제나 나보다 앞서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참 큰 그릇이었어요.  가까운 친구들끼리 농담 삼아 ‘만약 남북통일이 되면 통일된 한국의 초대 수상감’이다. 그때도 그런 이야길 했죠."

1965년 6월 14일부터 시작된 서울대 법대 학생들의 200시간 단식 투쟁으로 150여 명이 실려나간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 법대는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이 됐습니다. 조영래는 6월 22일부터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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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을 강력히 반대하기 위하여 서울대 법대생들은 1965년 6월 14일부터 시작하여 6월 22일까지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단식투쟁은 200시간의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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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 반대 혈서. 혈서 하단에 조영래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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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도빈

"2학년 때 이미 조영래가 전국의 총 대장 격이 됐습니다. 서울대뿐 아니고 다른 대학 선배들도 이미 조영래의 판단을 빌렸습니다. 조영래는 데모를 오늘 한다고 계획하면 누가 뭐 할지를 다 배치합니다. 선배들까지 배치합니다. 선배들도 후배지만 함부로 못하고, 조영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인터뷰한 사람들
김선수(연수원 17기) 법무법인 시민 대표, 여연심(연수원 36기)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 김도희 (변시 2회), 김소리(변시 4회), 김희진(변시 4회), 민창욱(변시 1회), 박수빈(변시 4회), 안희철(변시4회), 오영중(연수원 39기), 유남규(서울지방변호사회 조영래 추모사업 TF팀장), 이기연(연수원 43기), 이주언(연수원 41기), 장품(연수원 39기), 조연민(변시 4회), 최정규(연수원 36기), 이지현(연수원 4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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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임장혁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편집   박가영 기자 · 김현서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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