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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상형문자 시대의 재림 … 이모지 매일 60억건 넘게 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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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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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 공용어는 뭘까. 사람 수로 보면 중국어(13억 명)일 게다. 67개 국가에선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그런데 중국어보다 더 많이 쓰고, 사용 국가 수에서 영어를 능가하는 언어가 있다. ‘이모지(emoji)’다. 메신저나 소셜미디어에서 글을 쓸 때 붙이는 웃는 얼굴, 하트 등 다양한 모양의 아이콘을 말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매일 전 세계에서 60억 건 이상의 이모지가 전송됐으니 말이다. 상대가 영어를 쓰든, 중국어를 쓰든 웃는 얼굴 이모지는 웃는 얼굴이란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 속으로] 영어보다 많이 쓰는 세계 공용어 ‘이모지’
‘기쁨의 눈물 흘리는 얼굴’ 이모지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에 뽑혀
“손짓·몸짓·얼굴표정·억양 역할 대신”
미국인들 하루 평균 96개나 사용

 한낱 이모지를 거창하게 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이 발간하는 옥스퍼드사전은 사상 처음 글자가 아닌 그림을 ‘2015 올해의 단어’로 뽑았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face with tears of joy)’ 이모지다. 옥스퍼드사전 측은 “이모지는 더 이상 10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이모지와 이모티콘을 구분 없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모지와 이모티콘은 서로 조금 다르다. 이모티콘(emoticon)은 텍스트 위주의 환경에서 감정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문자기호를 말한다. 이모지는 쉽게 풀면 ‘그림문자 이모티콘’이다. 일본어로 그림문자를 뜻하는 에모지(繪文字)에서 유래한 영어 단어다. 일본 통신사 NTT 도코모의 개발자 구리타 시게타 가 1999년 선보인 250개의 그림문자가 기원이다. 구리타는 “당시 단말기와 통신망이 대용량 그래픽을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간단한 그림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던 중 나온 게 이모지”라며 “한자와 망가(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카카오톡에선 매일 평균 1000만 명이 이모티콘을 사용한다. 미국인은 하루 평균 96개의 이모지나 이모티콘을 쓴다. 영국인의 40%는 이모지로만 채운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인스타그램의 게시글이나 댓글의 절반 이상에서 이모지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세계적 유행을 놓고 일각에선 ‘상형문자 시대의 재림’이라고 평가한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의 기호 특성’에 대한 논문을 쓴 미디어컨설턴트 홍장선씨는 “기술의 발달로 비디오 통화를 많이 할 거란 당초 전망과 달리 요즘 사람들은 원할 때 답하고, 필요할 때 다시 볼 수 있는 메신저를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꺼린다. 그래서 3D(입체) 가상현실 통화가 가능하더라도 업무용으로만 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메신저가 계속 유행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계명대 국어교육학과 박선우 교수는 “메신저에 ‘안녕하세요’라고 쓰면 전화로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전달하는 정보가 적다. 말 한마디를 들으면 의미 이외에 성별·나이·교육·건강 등을 알 수 있는데 문자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모지는 문자언어에서 부족한 감정·뉘앙스 등을 보완한다”고 설명했다. 손짓, 몸짓, 얼굴 표정, 억양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이모지나 이모티콘을 덧입힌 글을 보면 쓴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알 수 있게 된다.

 미국 뉴멕시코대학 연구에선 참가자를 두 집단으로 나눠 메신저로만 소통하게 했다. 한쪽은 이모티콘을 허가했고, 다른 한쪽은 금지했다. 그랬더니 이모티콘 사용 집단이 더 만족감을 느꼈다. 일본 도쿄덴키(東京電機)대학 연구팀은 얼굴 모양의 이모지를 본 사람의 뇌는 진짜 얼굴을 보는 것처럼 반응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모지나 이모티콘을 본 사람은 그 모양을 따라 얼굴 표정을 바꾸기도 한다는 내용의 논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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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송사 CNN이 만든 내년 대선주자 이모지. 왼쪽부터 힐러리 클린턴, 링컨 채피, 마틴 오말리, 도널드 트럼프, 벤 카슨, 마코 루비오.

 이모지는 글로벌 공용어답게 세계 표준이 있다. 구글·애플·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 정보기술(IT) 기업들은 2009년 ‘유니코드 컨소시엄’을 만들어 722개 공통 이모지를 공개했다. 지금까지 여덟 차례 바뀌었다. 올 6월 확정된 ‘8.0 버전’엔 얼굴·행동·교통 등 다양한 종류의 이모지 1282개가 담겼다. 원산지가 일본인 까닭인지 일본 전통인형·벤토(도시락)·화투 등 일본풍 이모지가 상당수 발견된다. 개정 작업엔 시대적 흐름도 반영된다. 8.0 버전부터 동성 부부 도 이모지로 표현이 가능하게 됐다.

 말도 사람마다 말투가 다르고 지역에 따라 사투리가 있듯이 이모지 사용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박선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보다 2.5배 많은 이모티콘을 쓴다. 미국의 스마트폰 키보드앱 개발사인 스위프트키가 지난해 10월부터 올 2월까지 전 세계 16개 언어의 1억 건 글을 분석했더니 이모지 활용에 국가마다 특징이 있었다. 모든 국가에서 행복한 얼굴 이모지가 가장 자주 보였는데, 유독 프랑스만 하트가 가장 인기 높은 이모지였다. 러시아는 키스·러브레터 등 연애와 관련한 이모지 이용이 세계 평균보다 두 배 더 높았다. 호주에선 술 관련 이모지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자주 발견된다.

 이모지에 기댄 마케팅도 활발하다. 핀란드는 사우나를 즐기는 남녀, 헤비메탈 팬, 휴대전화기 노키아 3310 등 세금을 들여 만든 3종의 이모지를 국가 홍보사이트에서 다음달부터 무료로 나눠준다. 모바일 메신저 업체인 스냅스는 지난 9월 힐모지( 힐러리+이모지)를 공개했다. 미국의 민주당 대선주자 힐러리가 선글라스를 쓰고 전화통화를 하는 등 다양한 힐러리의 모습을 담았다. 스냅스의 창업자 비비앤 로젠탈은 힐러리 지지자다. 콘돔회사인 듀렉스는 콘돔 이모지를 다음 버전의 유니코드에 포함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성병 예방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GM 쉐보레는 2016년형 크루즈 보도자료를 이모지로 작성해 배포했다.

 이모지를 ‘방가(반가워요)’와 같은 축약어, 외계어(자모를 닮은 모양의 특수문자나 기호로 바꾸거나, 맞춤법을 무시하고 발음을 왜곡해 적는 통신문체) 등과 언어 파괴로 한데 묶는 시각이 있다. 특히 10~20대가 학교 숙제나 입사 지원서에 이모티콘이나 이모지를 쓴 사례가 나오면서 이런 세태를 꾸짖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영국의 뱅거대학 언어학과 비비앤 에번스 교수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이모지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것은 언어와 단어의 상식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원로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 박사는 “사람들은 문법 파괴형 문자메시지가 철자법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오히려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털 박사에 따르면 축약어는 낱말과 소리가 어떻게 연관됐는지 이해해야만 쓸 수 있기 때문에 문자메시지를 잘하는 사람이 철자법에도 강하다. 박선우 교수는 “이모지나 이모티콘을 언어의 진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소개하면서 “한때 자주 보였던 ‘방가’를 요즘은 덜 쓴다. 이모지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S BOX]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모비딕』도 이모지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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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지도 외국어처럼 배우는 데 지적 능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물론 직관적인 이모지 쪽이 훨씬 더 쉽다.

 그렇다면 이모지로만 소통이 가능할까. 글자는 하나도 없고 갖가지 이모지·픽토그램으로만 쓴, 중국의 설치미술가 쉬빙의 『지서(地書)』가 지난 8월 국내에 소개됐다. 이모지 디자이너인 조 헤일은 올해 이모지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인터넷에 공개했다. 2만7500여 단어의 이 소설은 2만5000여 개의 이모지로 ‘번역’됐다. 프레드 벤슨은 2010년 소설 『모비딕』을 이모지로 푼 『이모지딕』을 펴냈다. 의미를 유추하는 과정에서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지만 차이가 크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그래서 고전 『심청전』의 줄거리를 기자가 이모지로 옮겨 봤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주요 구절마다 해석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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