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페셜컬럼 D

약속시간 15분 전을 평생 지킨 '한국의 칸트' YS

중앙일보

입력 2015.11.23 16:04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십여 년 전, 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만나기로 한 회사 간부와 동행한 적이 있습니다. 약속 장소가 회사에서 20~30분이면 갈 수 있는 서울 시내 모 호텔이라 평소 같으면 반 시간 전 출발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헌데 이날 만큼은 이 분이 "일찍 가자"고 하시더니 한 시간 전에 출발하는 게 아니었겠습니까. 특별한 교통 체증이 없던 탓에 우리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호텔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차를 타고 호텔 밖을 몇 바퀴나 뱅뱅 돌아야 했습니다. "YS가 워낙 약속시간에 늦는 걸 싫어해서 조심하느라 그랬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도 곧바로 YS가 나타는 게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어김없이 약속시간 15분 전이면 오는 걸로 유명합니다.

YS를 이야기할 때면 늘 빠지지 않는 게 그의 철저한 시간관념입니다. 누구는 시간 관리에 철두철미했던 독일의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에 빗대 그를 '한국의 칸트'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YS는 재학 시절, 칸트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고 합니다.

시간 준수에 대한 그의 인식과 철학은 사소한 약속 이행 차원에서 훨씬 벗어나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작은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 큰 약속도 잘 지키며 이런 인물만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게 그를 잘 아는 측근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고를 가진 YS라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걸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가 거물 정치인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누구라도 늦으면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심한 사람이군". 그가 야당총재 시절 회의시간에 계속 지각한 정치인들은 눈 밖에 나 영영 재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반면에 회의 개회 시간에 한 사람이라도 앉아있으면 바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상도동계와 친인척 모두 시간 관념이 철저합니다.

언론과의 인터뷰 때에도 항상 제 시간에 나타납니다. 대신 취재기자가 늦으면 인터뷰가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YS 상도동 자택에서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했다 10분 늦게 도착했다고 문 밖으로 쫓겨난 기자도 있습니다.

약속 준수에 있어서 YS는 다른 사람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격했습니다. 1976년 아침 조깅을 결심한 이후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5시20분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곤 정해진 시간에 마산에 살던 부친에게 문안전화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공과가 엇갈리지만 적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사소한 약속까지 지킨다는 YS의 인생 철학은 후대의 모범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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