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YS 아니면 못 했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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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도입을 선언했다. 그해 11월 YS(맨 오른쪽)가 한일은행을 방문해 금융실명제 정착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중앙포토]

“저는 이 순간 엄숙한 마음으로 헌법 제76조 1항의 규정에 의거하여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합니다.”

경제정책 업적과 시행착오
당시 차명·가명 자금이 총통화 33%
양지로 끌어내기 위해 극비 작업
규제 풀고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
개방 역풍 부작용 … 외환위기 불러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45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금융실명제 도입을 전격 발표했다. ‘모든 금융 거래를 실명으로 해야 하고, 비실명으로 거래한 금융자산 소유자는 2개월 내에 실명으로 전환해야 하며, 5000만원까지는 자금 출처 조사를 면제한다’는 것이었다. ‘금융 계엄령’이란 말이 나올 만큼 파격적인 조치였다.

 금융실명제는 권력 핵심부에서도 극소수만이 사전에 알았을 만큼 철통보안 속에 준비가 진행됐다.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이었다”고 김 전 대통령은 훗날 회고록에 썼다. 93년 8월 말 기준으로 가명이나 차명계좌자금은 33조원이었다. 전체 금융자산 330조원의 10%, 총통화 100조원의 33%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였다.

금융실명제는 당시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 장관 팀이 총지휘했다. 실무 공무원 20명은 경기도 과천 주공아파트 한 채를 두 달간 빌려 합숙을 하며 준비했다. ‘현관문을 나설 수 없다’ ‘창문가에서 서성대지 않는다’ 등의 철저한 수칙 속에서 ‘금융실명제’ 작업명을 ‘남북 통일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YS의 대통령 재임 시 업적을 거론하며 "금융실명제는 일본도 못하고 있고, 하나회 청산은 YS만이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부동산에 지하 자금이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95년 1월 7일에는 ‘부동산실명제’ 도입도 발표했다. 이처럼 김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 강력한 경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집권 초기 90%의 지지율을 등에 업고 개혁정책을 잇따라 밀어붙였다. 취임 직후 ‘신경제 100일’ 계획을 발표하고 경제 규모 확대와 산업구조 고도화에 맞춰 기업 창업, 자금 조달, 시장 진입과 관련한 행정 절차를 간소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화’를 주창하며 시장 개방정책을 적극 펼쳤다. 이를 바탕으로 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꼽힌다. 하지만 OECD 가입은 한국 경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당시 허약했던 한국 경제체질로는 급속한 시장 개방과 이에 따른 자본 흐름을 버티기 어려웠다. 이는 대기업의 연쇄 부도로 이어졌다. 97년 1월 당시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한보그룹 특혜대출 비리에 이름이 오르던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검찰 수사 끝에 그해 5월 구속 수감됐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 “김기수 검찰총장한테 직접 전화를 해 차남 구속을 지시했다”며 당시를 ‘재임 중 가장 괴롭고 고독한 시간들’로 묘사했다.

 그해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넘자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상환 요구가 몰렸고, 외환보유액은 점차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97년 11월 21일 오후 10시 당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의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김형구·하남현·위문희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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