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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G] '레전드' 박정태 감독과 천종호 판사의 학교 밖 야구단 1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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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5일 오후 2시 부산시 기장군의 도예촌 야구장. 유니폼을 맞춰 입은 어린 선수들이 동그랗게 모여 다소 어색하게 스트레칭을 한 후 가볍게 운동장 두 바퀴를 돌았다. 본격적인 야구 훈련이 시작되고 선수들은 수비를 중점적으로 연습했다. 계속해서 공을 놓치는 2루수에게 “몸으로라도 막아!”라고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한국 야구의 전설, 박정태 전 롯데 2군 감독의 목소리다.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는 모습에 현역 시절의 ‘악바리 박정태’가 남아있었다.

박 감독은 ‘청소년의 대부’로 불리는 천종호 판사와 함께 지난달 24일 보호소년을 위한 레인보우카운트 야구단을 창단했다.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들과 학업에서 이탈한 학교 밖 청소년들이 선수로 그라운드에 서는 야구단이다. 보호처분이란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소년원에 보내지 않고 자기 집이나 특정 시설에서 지내면서 보호관찰 등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전체 선수는 3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주 목요일마다 열리는 훈련에는 보통 20명 정도가 참여한다. 아직 미숙한 실력 탓에 여기저기 실수가 이어지는 운동장에 박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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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박정태 감독은 야구단원들과 함께 펑고훈련(수비훈련)을 진행했다.

“다른 건 필요 없다. 야구는 단체 운동이고 한 사람이 잘해가꼬 될 일이 아이야. 니 혼자 하면 진다. 전부 뭉쳐야 돼. 동료가 힘들어 하면 힘내라고 해주고 잘하면 잘한다 박수쳐 주고. 이래야 동료애가 생기는 기다. 주장 이리 온나! 여기 딱 서가(서가지고), 손 내밀고 파이팅 해!”

우리, 같이 야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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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카운트 야구단 창단은 박 감독이 부산가정법원을 직접 찾아가 제안했다. 야구를 하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방황하는 청소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청소년들이 운동을 함께함으로써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박 감독의 취지에 공감한 최인식 부산가정법원장과 천 판사가 지원에 나섰다.

이후 본격적인 선수단 구성에 착수한 박 감독은 부산아동청소년상담교육센터, 청소년 회복센터, 학업복귀 지원센터 틴스토리 등 관련 센터들을 다니며 청소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은 30명이 레인보우카운트 야구단의 창단 멤버가 됐다.

박 감독도 10대 시절에 야구가 유일한 돌파구였다.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비뚤어진 승부욕으로 표출되던 시기였다고 스스로를 돌아봤다.

“학교 다닐 때 매일 도서관에서 반성문 쓴 기억밖에 안 나요. 선생이 사람 취급을 안하더라고요. 맨날 냄새 나는 쓰레기통 옆에 앉으라고 하고. 그러니까 속으로 죽여버리고 싶은 분노가 생기는 거죠.”

지독히 가난했다. 석 달에 한번 꼴로 이삿짐을 싼 통에 주민등록 등본을 떼어 보면 주소지 이전 목록만 두 장이 넘는다. 괜한 반항심에 중학교 시절엔 거의 가출 상태로 지냈다. 배고프면 슈퍼에서 초콜릿 따위를 훔쳐 먹고, 돈이 필요하면 무리들과 유흥가에서 맥주도 날랐다. 주먹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부자 애들만 골라서 괴롭혔다. ‘쟤들이나 나나 무슨 차이가 있나. 내가 가난을 선택한 건 아닌데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억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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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감독의 지시에 따라 수비 훈련을 하는 야구단원

“야구가 아니었다면, 아마 진즉에 (소년범이 돼) 천종호 판사님 같은 분을 만났을 지도 모릅니다. 이 아이들 눈빛이 제 어렸을 때 눈빛하고 똑같아요. 그때 야구부 감독님이 저를 잘 잡아주신 것처럼 이제는 제가 애들을 붙들어 줄 차롑니다.”

야구단 공식 창단은 10월에 했지만 훈련 모임은 9월부터 비정기적으로 가져 왔다. 처음에는 공도 못 보고 수동적이었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봐 온 박 감독은 “야구는 저렇게 해야 실력이 늘어요”라며 흐뭇해했다. 2주 만에 야구장을 찾은 천 판사도 “아이들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며 깜짝 놀랐다.

“기죽지 마, 네 재능을 찾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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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칠한 키에 공도 잘 받고 송구자세도 제법 나오는 최민준(가명)군은 “재밌어요. 학교 안 가서 심심한데 여기 오면 시간도 금방 가고 새로운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요”라며 웃었다. “연습이 없는 날인데도 연습을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처음에는 뛰는 것도, 공 줍기도 귀찮았는데 이젠 그런 생각 안 해요.”

야구단원 최군은 중2 때 친구를 따라 가출한 적이 있다. 돈이 필요해지자 편의점에서 돈을 훔쳐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했다. 그렇게 절도로 소년보호재판을 받았다. 방황의 시기를 지나던 중, 올해 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최군은 현재 회복센터에서 지낸다. 올해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최군은 내년에 학교로 돌아갈 계획이다. 이미 야구를 즐길 줄 알게 된 최군은 “학교에 가면 야구단을 그만둬야 하는 게 원칙이겠지만, 학교에 얘기해서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크지 않은 규모로 시작된 레인보우카운트 야구단이지만 박 감독이 생각하는 의미는 크다. 단기적으로는 아이들 마음의 벽을 허물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지만, 멀게는 대안학교를 만들어 정식 야구단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것이 박 감독의 바람이다. 대안학교가 되면 다른 학교와 경쟁도 가능해진다. 박 감독은 “잘하는 아이가 있다면 이대호나 추신수보다 더 큰 선수로 키워보려고요. 야구뿐 아니라 축구·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로 아이들의 재능을 찾아주고 싶어요”라며 “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기죽지 않도록 도와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길을 헤매며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집으로 돌아오는 법(Home in)을 알려주고 있었다.

글=성슬기 인턴기자 tong@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영상=전민선 인턴기자

②편에서 계속 [레인보우 야구단] ②“이 사회가 아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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