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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마누엘 칼럼

한국 산업의 매너리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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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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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페스트라이시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과 한국 제품의 질에 감탄하곤 한다. 사실 한국인들은 갈수록 정교한 제품을 디자인하고 제조함으로써 세계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필자는 그 생산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려도 금할 수 없다. 새로운 산업의 개척을 가로막는 뿌리 깊은 매너리즘 때문이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그간 한국이 이룩한 놀라운 기술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매너리즘은 르네상스 시대의 고상한 예술 장르가 아니다. 바로 주어진 특정 장르에 매몰된 채 스타일만 바꾸려는 습성을 가리킨다. 희망찬 미래산업을 향한 원대한 비전보다는 기존 제품의 디테일한 면에 집착하는 경향 말이다. 이렇게 되면 근시안적이고 심각한 문화적 정체로 이어질지 모른다. 특정 제품의 세부적인 면에 과도하게 집착해 그 제품이 갖는 보다 큰 사회경제적 의미를 무시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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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매너리즘은 스마트폰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한국의 수많은 엔지니어가 새로운 기능이 첨가된 스마트폰을 만들기 위해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린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한 기능만 첨가될 뿐 새로운 분야 개척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가령 시중에는 액정화면이 휘어지거나 사용자의 손이나 눈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광학센서가 부착된 스마트폰이 출시됐다. 자동차의 경우 NVS(소음, 진동, 견고성) 분석 기법을 통해 운전자의 승차감이 좋아지고, 엔진의 효율성이 높아지며, 차 섀시도 충돌 시 충격을 크게 줄여준다.

 편리성 향상에 초점을 맞춘 이 모든 노력을 십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혁신은 휴대전화이건 자동차건 모든 제품이 영원히 생산될 것이란 전제 아래 이뤄지는 세부적 변형에 불과하다.

 한때 한국에는 자동차나 휴대전화가 없었다. 그렇다면 미래 어느 시점에 한국에서 자동차나 스마트폰이 더 이상 쓰이지 않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기술을 이용한 전혀 다른 제품과 서비스가 생길 수도 있다. 생태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보다 더 건전하고 수익성 높은 제품들 말이다.

 한국은 섬유산업을 발판으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섬유산업이 언제까지 한국의 주요 산업으로 남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다가올 미래를 신속하게 내다보고 재빨리 새로운 산업으로의 진입을 준비하는 능력 덕분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능력은 대단한 성공을 가져왔다.

  새로운 수요에 대응해 줄기차게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산업의 발전이 가능하다. 특히 요즘 세계는 급격히 변하고 있다.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더 이상 한국의 성공신화가 먹힐 것이란 보장도 없다. 이제부터 한국의 진짜 천재성은 더 좋은 스마트폰을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뭔가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려는 도전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요즘 이게 잘 안 되는 이유는 한국이 기술수준은 계속 발전해도 그 과정에서 보다 근본적인 “왜?”라는 문제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왜 우리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하며 그런 제품이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대응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매일 놀라운 제품을 생산하면서도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이는 학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지구온난화와 인구의 급속한 노령화로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혁신적인 신기술을 요한다. 그렇다면 삶의 양식과 도시공간을 획기적으로 바꿀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기존 제품을 개선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전혀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에도시대 일본 유교학자 오규 소라이(荻生<5F82>徠)는 이렇게 말했다. “바둑을 두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바둑 규칙에 도통해 본능적으로 실수 없이 둘 수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바둑의 규칙 자체를 만드는 사람이다.”

 바둑에서 최고의 전략은 기존의 규칙을 통달하는 단계를 넘어 전혀 새로운 스탠더드를 창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한국의 산업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도 이제 기존에 생산해 온 제품과 전혀 다른 제품, 전혀 새로운 분야, 전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은 이미 기존의 기술과 생산공정을 거의 완성한 단계나 다름없다. 이젠 새로운 제품 개발뿐 아니라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꿀 혁신적인 시스템과 철학의 선두주자가 돼야 한다. 철도가 19세기를 바꾸고, 고속도로가 20세기를 변화시켰다면 21세기는 무엇이 ‘게임 체인저’가 돼야 할까. 그 대답은 불행히도 교과서엔 나와 있지 않다. 오직 모든 도전을 미리 꿰뚫어보는 상상력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기존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에서만 나온다. 한국의 산업이 매너리즘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시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