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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파리 테러는 실패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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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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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파리는 시험에 들었다.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톨레랑스는 분명 도전 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파리는 이겨낼 것이다. “관용을 말하는 것 자체가 불관용”이라며 “관용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없애버리라”던 미라보 백작의 나라 프랑스는 극복해낼 것이다.

 프랑스의 심장을 찢어놓은 이번 테러로 프랑스에서 톨레랑스의 용도 폐기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1월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때도 나온 목소리가 더 커졌다. 2013년부터 시리아 폭격을 반대하던 좌파 철학자 미셸 옹프레가 “샤를리 테러는 우리들의 9·11”이라 외칠 정도였는데 그것과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아픈 상처를 입은 지금 어찌 그렇지 않겠나.

 그 목소리에는 은근한 조소가 섞인 것 같기도 하다. ‘너희들이라고 별 수 있냐’는 말이다. 외도 때조차 경호원 스쿠터 뒷자리에 매달려 엘리제를 나가던, ‘상남자’와는 거리가 먼 사회당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테러를 절멸시킬 전사를 자처한 게 가장 먼저 꼽히는 ‘탈(脫)톨레랑스’의 예다.

 하지만 잘못 짚었다. 그런 추악하고 비열한 테러를 당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 정도 단호함도 없다면 그건 겁쟁이일 뿐 다른 이유가 아니다. 악(惡)마저 용인하는 게 톨레랑스가 아니다. 팔뚝이 문신으로 덮인 깍두기 머리한테 자리를 양보하는 게 배려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공포와 분노가 범벅이 된 상황에선 어떤 소리도 나올 수 있다. 그 대목에선 “무슬림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찌질이들도 으레 등장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다. 이미 우리는 이성을 찾아가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 “문 열려 있어요(Porte Ouverte)”라던 SNS 글들은 곧 “나 테라스에 있다(Je suis en terrasse)!”로 바뀌었다. 테러 피해자들에게 숨을 곳을 제공하려던 소극적 공포가 “내가 겁 먹기를 바랐다면 너희들은 실패했다”는 적극적 대처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테러 현장인 바타클랑 극장 앞에서 찍힌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장면은 프랑스인들이 톨레랑스를 자식들에게 어떻게 교육하는지 보여준다. 다섯 살짜리답지 않게 근심이 가득하던, 아빠의 설명에 반신반의하다 끝내 미소를 되찾던 꼬마의 표정에서 세계인들은 프랑스 톨레랑스의 힘을 봤다. 더욱 놀라운 건 그들 부자가 베트남계 프랑스인이었다는 거다. 피부색이 달라도 같은 프랑스인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더 큰 힘이다.

 이것이 알제리 전쟁 때 알제리 편을 들던 장폴 사르트르를 사법처리하자는 참모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냅둬. 그도 프랑스인이야”라고 말하던 샤를 드골 대통령, 정치적 망명을 불사하고 대통령에게 드레퓌스 대위의 무죄방면을 요구하는 공개서한 ‘나는 고발한다’를 썼던 에밀 졸라, 더 멀리는 “나는 당신과 의견이 다르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볼테르에서부터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프랑스적 가치다. 그들에게 무슬림이란 건 아무런 장벽도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건 그것을 자신을 위한 기회로 바꿔보려는 정객들한테뿐이다. 거리낌없이 “급진 이슬람주의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자”고 주장하는 사르코지 전 대통령 같은 사람 말이다. 그들은 해결책으로 늘 극단적 방법만 찾는다. 대중들에게 화끈하게 어필할 수 있는 까닭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 같아도 나중에 가장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알아도 말하지 않는다. 반무슬림 정서가 확산되면 소외된 무슬림들이 훨씬 과격해질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톨레랑스는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추구한다. 이슬람국가(IS) 같은 깡패집단에 왜 젊은이들이 동조하는지 고민하고 그걸 막을 길을 찾는다. 톨레랑스야말로 테러를 이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인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