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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1호 인명구조사가 된 25세 소방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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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소방서가 소녀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늘 ‘선생님’이라고 써왔던 여고생은 소방서의 여자 소방관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이시여/제가 부름 받을 때에는/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너무 늦기 전에 아린 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라는 싯구를 보게 됐다. 한 미국 소방관이 쓴 ‘어느 소방관의 기도’였다. 교대나 사범대를 가겠다는 마음이 흔들리고 대신 소방관된 자신의 모습이 상상 속에 펼쳐졌다.

충남 보령소방서의 이루리(25) 소방교가 말한 소방관이 되기까지의 사연이다. 그는 인명구조사가 됐다. 여성으로서는 국내 1호다. 지난달 치러진 시험에서 합격해 20일 인명구조사 2급 자격증을 받는다. 전국에 현재 2156명의 인명구조사가 있다. 여성들도 꽤 많이 도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수중 구조, 로프 하강 등 10여 개로 구성된 시험의 합격 기준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 이 소방교는 4수 끝에 붙었다. 이 시험은 한 해에 두 차례(봄과 가을) 치러진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이 소방교는 군산에서 자라났다. 소방관이 되기 위해 원광대 소방행정학과로 진학(09학번)했다. 대학 4년학년 때 공채에 합격해 소방관이 됐다. 2013년 가을에 충남 서천소방서로 발령 받았다. 이듬해 1월에는 현장대응단이라 불리는 구조대로 배치됐다. 이 소방교의 희망사항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렇게 충남 지역 최초의 여성 구조대원이 됐다. 그리고 최근에 보령소방서의 구조단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지난 봄의 인명구조사 자격시험의 합격률은 35.5%였다. 남녀 응시자를 통튼 결과다. 열 명 중 일곱 명꼴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이 소방교는 “시험 과목이 많기 때문에 뒤로 가면 체력 저하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 때문에 세 차례나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소방관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다 갖추고 싶다. 다음으로 적십자사의 라이프가드 자격증과 소형 선박 운항 자격증에 도전하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키 160㎝에 몸무게 50㎏. 이 소방교가 밝힌 자신의 신체 지수다. 운동을 좋아하지만 격한 운동은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소방관이 되기 전까지 수영도 못했다고 했다. “첫 인명구조사 시험 때는 석 달 동안 수영을 배우고 갔는데 시험에 턱걸이 할 정도의 실력이 됐어요. 그런데 수영에 너무 기운을 빼 다른 시험 과목에서 체력이 방전돼 버렸어요.”

그는 구조대 출동 지역이 화재 현장일 경우에는 방화복을 입고 산소통을 메고 출동한다. 몸무게의 절반 이상인 25∼30㎏의 무게가 얹혀진다. “처음에는 무거워서 몸이 주체가 잘 안됐는데 익숙해지니까 별로 무겁게 느껴지지가 않아요.” 그의 설명이다.

이 소방교는 약 2년간 구조대원으로 활동하며 400회 가까이 출동했다. 화재·교통사고·산악사고·자살기도·동물구조 등 현장은 다양했다. 그는 건물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화재 현장에서 발이 진흙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됐을 때를 가장 아찔한 순간으로 기억했다. 자해를 하며 자살을 시도하던 20대 여성을 다독여 응급처치를 한 뒤 병원으로 옮겨 생명을 구한 날을 가장 보람 있던 때로 떠올렸다. 남성 구조대원이 모두 실패한 설득을 자신이 해냈기 때문이다.

“어떤 소방관이 되고 싶냐”는 물음에 그는 “소방관의 임무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소방관으로서의 직업적 꿈은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이 다음에 후배 소방관에게 경험을 나눠주는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9일 아침 이 소방교에게 전화를 걸자 통화대기음으로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가요 ‘시간이 달라서’(스탠딩 에그)가 흘러나왔다. 거친 현장을 누비는 그에게서도 또래 친구들과 다를 것 없는 감성이 엿보였다. 그는 “바빠서 남자 친구 사귈 시간이 없었어요”라는 말을 할 때는 몹시 수줍어 했다.

이상언 기자 lee.sang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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