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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좌우편향 없는 중도적 실용주의가 순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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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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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정부가 국사 교과서를 검인정에서 국정으로 바꾸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 국론은 좌우 이념대결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정부가 국정화 불가피론을 제기한 기본적 이유가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이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는 과소평가하면서 북한 정권은 은연중 미화하고 있는 좌파적 역사관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주장하는데도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국사학계에서는 검인정교과서의 내용에 대한 치열한 논쟁보다는 교과서 편찬 방식에 대한 절차 논쟁에 매몰되고 있다. 일반 국민들 입장에서는 역사란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일반론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대의 정권이 갖고 있는 역사관을 획일적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다소 우세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동족상쟁의 참혹한 전쟁을 치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세계 유일의 냉전국가이기 때문에 좌우 이념갈등이 남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보면 좌우 이념대결은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사반세기가 지났다. 자유민주주의와 개방적 시장경제가 보편적 글로벌 가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북한식 세습 독재체제와 주민을 굶주리게 만드는 통제적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남한의 자유민주체제·시장경제체제와 비교하면서 옥석 구분을 못하는 역사관이 우리 사회 일각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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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사회 구성원들을 골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정치와 경제시스템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선거에 의존하는 민주체제는 포퓰리즘에 휘둘려 국가 재정이 빚더미 속에 빠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이 전체주의체제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세계 역사가 실증했다. 유일한 해법이 있다면 경쟁질서의 공정성과 분배구조의 형평성을 높여 나가는 구조개혁을 부단히 추진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변화를 뒷받침할 정치체제는 무엇이며 국가 경영원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해법을 정치활동의 자유는 보장하되 행정과 사법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한 우리나라 헌법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국민들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인위적으로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정치권 내에서 용해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감성과 이성을 함께 지닌 존재로서 가슴으로 느끼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과 머리로 생각하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며 이들 간의 선악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사회 내부에도 평등을 지향하는 좌파적 열정과 효율을 중시하는 우파적 지성이 공존한다. 나는 우리 국민들의 60% 이상이 감성과 지성이 대체로 균형된 중도적 실용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양쪽의 장점을 잘 조화시키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만큼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 정치구도가 이런 식으로 안정화되면 테크노크라트인 관료층이 이끌어 가는 행정부와 사회적 계약인 법질서를 이끌어 가는 사법부는 탈이념적 중도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국사 교과서 문제는 정치권에서 여야가 이념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행정부가 인위적으로 제압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교육부로 하여금 교과서의 내용을 바로잡는 데 전력을 기울여 국민의 공감을 얻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교육부가 책임 관리해온 검인정 방식을 무조건 폐지할 것이 아니라 그 관리 방식의 미비점을 최대한 보완하는 노력을 선행하면서 이와 병행해 국정교과서를 정부 개입 없이 역사학계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력해 제대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검인정과 국정 중에서 최종적인 선택은 학부모와 교사들의 합의에 따르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전교조 같은 외부 세력의 개입을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현 정부가 추진하는 4대 개혁이 국사 교과서 문제 때문에 정치권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하고 특히 교육부는 교육개혁의 추진 동력을 완전히 상실할 우려마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존의 시대를 넘어 융합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학문도 이공계와 인문사회계가 융합되고 기술도 재래 기술과 IT 기술이 융합되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경제도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뤄야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고 외교와 안보까지도 정치체제가 다른 미국과 중국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따라서 정부 정책은 좌우편향이 없는 중도실용주의로 접근해야 경쟁력 있고 안정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