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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서점의 ‘중립성 논란’과 우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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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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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도쿄 특파원

도쿄에서 시간이 날 때면 자주 서점에 간다. 진열된 책들을 둘러보는 건 흥미롭다. 예기치 않게 좋은 책을 발견하면 횡재한 기분이다. 일본의 전반적인 사회 흐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베스트셀러를 훑어본 뒤 새롭게 만들어진 특별 코너가 있는지 살핀다. 독자들의 관심에 민감한 서점들은 시대 상황에 맞춰 잘 팔릴 만한 책들을 한데 모아 진열한다. 그런데 이 특별 코너가 ‘중립성 논란’에 휘말렸다.

 도쿄의 대형 서점인 ‘마루젠&준쿠도’ 서점 시부야(澁谷)점이 지난달 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필독서 50’이란 타이틀로 진행하던 도서전을 갑자기 중단했다. 추천 도서들이 “정치적으로 편향됐다”는 우익의 강한 비판에 버티지 못한 거다. 그러자 100여 개 중소 출판사로 구성된 ‘일본출판자협의회’는 “도서전 중단은 출판사와 서점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며 항의 성명을 냈다. 언론과 민주주의의 보루인 서점이 좋은 책을 독자들에게 추천할 권리와 자유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잇따랐다.

 ‘마루젠&준쿠도’ 서점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국민 반발과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 19일 안보법제를 참의원에서 통과시킨 직후 도서전을 시작했다. 반대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 단체 ‘실즈(SEALDs)’가 펴낸 『실즈 민주주의란 이것이다』와 오쿠마 에이지(小熊英二)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의 『사회를 바꾸려면』 등 안보법 국면에 맞는 추천 도서 50권을 진열, 판매했다. 밀의 『자유론』과 플라톤의 『국가』 등 고전들도 계산대 앞 선반에 올렸다.

 도서전 초기부터 서점 인터넷 홈페이지에선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취지에 공감한다는 의견과 ‘반(反)아베’ 시위를 부추긴다는 비판 댓글이 충돌했다. 논쟁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건 서점 직원이 무심코 올린 트위터 글.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 때까지 나도 싸우겠다”는 내용이 우익을 더욱 자극했다. “개인 의견일 뿐”이라며 서점이 진화에 나섰지만 “아베 정권을 투쟁의 상대로 생각한 것”이란 우익의 압박은 결국 서점을 무릎 꿇게 했다.

 일본 서점들은 지난 5월 안보법안 국회심의가 시작된 뒤 앞다퉈 민주주의를 주제로 특별 코너를 마련했다. 대부분 우익의 비판과 항의에 시달렸다. 고노이 이쿠오(五野井郁夫) 다카치호 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지금 일본은 권력에 맞서는 의견을 ‘편향’이라고 자율 규제하는 ‘아래로부터의 우경화’ 상황에 놓였다”고 분석했다. 아베 정권에 의한 ‘위로부터의 우경화’만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서점이 그 표적이 됐지만 민주주의를 얕보는 사례는 더 많다”고 덧붙였다.

 책은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시각의 책을 골라 읽는 건 결국 독자의 몫이다. 도쿄의 한 서점 주인은 “서점에 획일적인 중립을 요구하면 여론의 자유로운 흐름이 차단된다”며 이렇게 물었다. “서점은 정말 중립이 아니면 안 되는 겁니까?”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