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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가슴 울리는 한 구절 한 구절 따라 쓰며 마음에 적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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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

“예쁜 글씨·그림으로 필사책 여백 채우며 사색의 즐거움 만끽”

울긋불긋한 단풍에 취하다 보니 가을이 저만치 가고 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한적한 공간에서 조용히 사색할 만한 때다. 특히 올해에는 책 위에 손글씨를 적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한동안 책 위에 글귀를 따라 적는 필사(筆寫)책이 인기를 끌더니 엽서를 직접 만들 수 있는 엽서책까지 나왔다. 왜 손글씨에 빠지는 걸까. 글=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사진=조상희(프로젝트100), 만년필 협찬=몽블랑

“사각사각.” “책 읽는데 소리가 나고 요란스럽죠? 시를 읽으면서 그중 마음에 드는 시는 따라 쓰고 있어서 그래요.” 이달 초부터 필사책을 사서 읽고 있다는 직장인 김지인(32·여·서울 시흥동)씨는 만년필을 들고 시를 따라 쓰는 것이 새로운 취미라고 말했다. 이처럼 필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가을철 사색 활동으로 문장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담아 따라 쓰는 손글씨 적기가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글을 베껴 쓰는 행위를 뜻하는 필사는 종전까지 주로 성경이나 불경과 같은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책을 따라 쓰려는 사람이 하는 일종의 ‘종교 활동’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힘든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찾고 사색의 즐거움을 느끼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필사족’이 더욱 늘고 있다.

정성으로 만든 나만의 콘텐트

게다가 손으로 쓰는 아름다운 글씨를 뜻하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취미활동으로 떠오르면서 필사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캘리그라피를 배운 사람들이 낱장의 종이와 엽서에 글을 쓰다가 필사책으로 넘어와 책 위에 글귀를 따라 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 캘리그라피를 하다 필사책을 알게 됐다는 강명선(27·여·경기도 안산)씨는 “캘리그라피만 배울 때는 노래 가사나 제목을 적으며 다른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제는 필사책에 캘리그라피를 하며 따라 쓰는 시 내용을 마음속으로 느끼고 생각하며 따라 적는다”고 말했다.

 필사는 독자에게 사색의 시간과 함께 나만의 콘텐트를 만들 수 있다는 만족감을 준다. 한국트렌드연구소 박성희 책임연구원은 “디지털화된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획일화된 콘텐트가 아닌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콘텐트를 찾으며 손글씨에 주목한다”며 “손글씨를 써서 사진을 찍은 후 개인 SNS에 올리며 딱딱한 디지털 기기에 자신만의 개성과 아날로그 감성을 부여한다”고 분석했다.

엽서책·질문책 등 종류 다양

필사를 겨냥한 책도 속속 나오고 있다. ‘섬진강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택 시인은 지난 6월 따라 쓰기 쉬운 여러 작가의 시를 모아 필사책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를 출간했다. 이 책은 지난달까지 3만 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필사책은 책 전체가 글로 빼곡히 채워지지 않고 한 페이지는 한 문단 정도의 글귀가 있고 다른 한 페이지에는 이를 따라 쓸 수 있는 공백이 있다. 글귀에 어울리는 색상의 배경이 있고 글귀 옆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필사책의 주요 독자는 20~40대 여성이다.

 지난 8월 필사책 『오늘, 행복을 쓰다』를 낸 김정민씨는 “많은 독자가 눈으로 책을 읽는 것을 넘어 필사함으로써 독서 범위를 확장시키고, 글 내용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실현되길 원하는 마음에 필사책을 선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글씨를 쓸 수 있는 색다른 도서로는 엽서책, 질문책도 있다. 엽서책은 책 위에 색을 칠하는 컬러링북과 필사책을 합쳐 놓은 형태다. 독자는 책에 그려진 도면에 색칠하고 글귀를 따라 적은 후 완성한 페이지를 뜯어 엽서처럼 활용해 주변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나눠줄 수 있다. 컬러링북과 필사책은 나만 소유하는 콘텐트를 만들었다면 엽서책은 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형태다.

인생의 길 찾는 데 도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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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책 전체가 독자에게 묻는 질문과 이를 답할 수 있는 빈칸으로 구성된 질문책도 나와 있다. 질문책은 ‘사랑’ ‘성격’ ‘인간관계’ 등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여러 질문을 던진다. 대표적으로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책인 그레고리 스톡(Gregory Stock)의 『질문 책(The Book of Questions)』이 있다. 이 책에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맺을 때 기억해야 할 질문 300여 가지가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 독자는 그저 질문을 읽고 자신만의 답을 적거나 생각하면 된다.

 아직 국내에는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원서를 구입해 읽은 직장인 심우석(34·서울 잠원동)씨는 “보통 자기계발 서적을 읽으면 인생에 대한 정해진 답을 주입시키는데 이 책은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생각하며 직접 내 인생의 답을 천천히 적으며 찾도록 도와준다”고 전했다.

 캘리그라피 작가인 배정애씨는 손글씨만의 매력에 대해 “키보드를 두드리면 직접 쓰는 것보다 속도는 빠르지만 정해져 있는 폰트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정성을 담기 어렵다”며 “손글씨로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문장에 마음이 담기고 온전히 글 내용이 내 것이 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을 받는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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