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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중국은 ‘반도체 굴기’ 한다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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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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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2000년대 초반 중국이 경제개방에 가속도를 내며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리던 때에 중국 산업 실태 취재팀으로 중국에 갔었다. 당시 중국은 언론 취재도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허락된 취재만 가능했지만 우린 신고를 하지 않고 중국 각 산업도시를 돌며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만나고 싶은 경제 관리들은 거의 만났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담당 기자라는 것만 팔면 당의 지시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취재를 환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반도체를 열망하는지 설명했고, 시스템 반도체를 제작할 수 있는 파운드리 팹을 보여줬고, “투자만 해주신다면 분골쇄신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起)를 선언한 건 5년 전이지만 그들의 반도체에 대한 집념과 모색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마침내 중국은 자체 메모리 공장을 직접 짓는다고 밝혔다. 시스템 반도체와 달리 메모리는 진입장벽이 높다. 그래서 중국은 끈질기게 메모리업체 인수합병(M&A)에 도전했다. 마이크론 인수합병을 추진하다 무산됐고, 최근엔 미국의 낸드플레시 업체인 샌디스크를 우회 인수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샌디스크의 기술 이전을 막을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인 만큼 M&A를 통한 메모리 진출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직접 투자에 나선 거다.

 사실 반도체 업계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중국이 반드시 메모리에 진출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연구와 인재 양성에 밑 빠진 독에 불 붓기 식의 투자를 하는 그들의 집념을 말이다. 지난해 반도체 최고 권위의 국제반도체소자학회(IEDM) 학술지엔 중국발 논문이 26편 실렸다. 한국(13편)보다 두 배 많다. M&A가 아니어도 인력을 빼오거나 양성해 반도체에서 성공한 한국의 사례처럼 그들도 못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우리 반도체가 중국에서 위협당하리라는 것도 우린 모두 10여 년 전부터 알았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대규모 투자와 더욱 첨예한 기술 개발로 중국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겠단다. 5~10년 안에 중국 반도체가 한국의 위협 요인이 되진 않을 거라고 한다. 그럴 것 같다. 한데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시장이다. 세계 메모리의 절반을 쓰는 중국이 국산화 전략으로 저급 기술을 감수하면 우린 반도체를 내다 팔 시장이 확 줄어든다. 그리고 10년 후 우린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반도체 산업에 대한 처방은 10~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시스템 반도체를 육성하고, 낙후된 장비·부품·소재 산업을 키우고…. 알면서도 그 긴 세월 동안 못했다. 물론 알면서도 못한 게 반도체만은 아니니 일단 못한 건 둘째로 치자. 진짜 문제는 세계 메모리 시장 70% 점유의 영광 뒤에서 우리 반도체 산업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함께 발전하며 지탱하는 생태계가 무너졌다는 거다.

 일단 전문가 교육과 연구 풍토는 흔들린 지 좀 됐다. 전공자 수는 줄고, 급기야 서울대반도체공동연구소는 후임 소장 자리도 구인난이다. 내년 정부 예산에 반도체 R&D 예산은 없다. 시스템 반도체 육성? 시스템 반도체는 자본이 아니라 아이디어와 기술로 승부를 보는 만큼 디자인하우스들이 클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한데 10여 년 전만 해도 디자인하우스들이 나름 의욕적으로 활동했는데 지금은 아예 신규 창업도 없고 지리멸렬하다. 대책과 거꾸로다. 왜? 대기업들이 TV 구동 시스템 같은 작은 것조차 자체 개발하거나 웬만하면 간단하게 수입해버리니 디자인하우스들이 설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지의 양분과 태양빛을 다 빨아들이는 거대한 나무 밑의 그늘은 매우 어둡다. 우리 반도체도 세계 1위 메모리의 찬란한 영광 아래서 생태계는 빛도 받지 못하고 시들시들 말라죽고 있었던 거다. 이제 거센 외풍이 불어오면 거대 메모리 홀로 맞서 싸워야 한다. 꺾이든 버티든. 이제 우린 공생 개념 없는 승자 독식의 정글 사회가 맞는 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