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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 햇살처럼 달콤한 音… 音… 音…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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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27면

LA필하모닉이 상주하는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다.

몇 주 전 회사일로 LA에 다녀왔다. 도착한 날 저녁, 짐도 풀지 않고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로 향했다. 이 건물은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또 다른 역작이다. 콘서트홀은 은빛 범선의 모양을 하고 도시의 밤하늘을 날아가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건물을 보기 위해서만 간 것은 아니다. 허겁지겁 공연장을 찾은 것은 구스타브 두다멜과 LA필하모닉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두다멜은 이날 스트라빈스키를 연주했다.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의 음향은 소리의 질감이나 명료함, 위상감 등에서 최상위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 했다. 공연 내내 풍요롭고 윤기 있는 소리에 음향적인 포만감을 느꼈다.

구스타브 두다멜의 말러 교향곡 9번.

개인적으로는 꽤 오랫동안 지휘자 구스타브 두다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전국적인 음악교육 프로젝트인 ‘엘 시스테마’가 낳은 스타다. 범죄에 노출된 아이들을 음악교육을 통해 계도하려는 목적을 가진 일종의 계몽 프로젝트였다. 결국 내 편견의 요체는 구스타브 두다멜의 인기가 음악적 해석 능력보다는 베네주엘라의 엘 시스테마에 대한 서구 사회의 경외감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베토벤을 시작으로 점점 레퍼토리를 넓혀가고 있었음에도 선뜻 그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2004년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말러 사이클에 대해 시기상조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색안경을 벗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말러 교향곡 9번을 듣고 있었다. 1악장 안단테였다. 중간부터 듣게 되었는데 누구의 연주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꽤나 설득력이 있었으며 음향 또한 신선했다. 드라이하지만 가볍지 않은 화이트 와인과 비슷했다. 말러의 9번은 예전부터 죽음이라는 묵직한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말러의 제자이자 초연을 맡았던 브루노 발터도 이 곡을 ‘대지의 노래’ 이후 죽음과 초월에 대한 음악적 진술로 설명한다. 하지만 당시 들었던 연주는 빛의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청동기의 녹슨 푸른 빛이 아닌 구름 사이로 한번 씩 드러나는 겨울철 햇빛 같은 달콤한 여운이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연주자와 악단을 알기 위해 애를 썼다. 오랜 시간 관심의 영역 밖에서 멀뚱거리고 있던 구스타브 두다멜과 LA필하모닉이었다. ‘두다멜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색안경을 내리기 시작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마친 사람처럼 “아! 그래서 이런 음향과 해석이 나오는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악단은 유럽에 비해 금관이 직설적이다. 그나마 미국 오케스트라 중에서 동부의 강자들은 유럽 사운드의 융숭함을 어느 정도 간직한다. 하지만 서부 사운드는 날씨만큼이나 밝다. LA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그곳의 날씨가 ‘더운 날과 더 더운 날만 있다’거나 ‘LA의 가장 좋은 점은 오로지 날씨’라고 할 정도였다. LA필하모닉의 사운드 역시 한국의 6월 날씨 같다는 게 지금까지의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도시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와의 상관관계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LA필의 말러 연주에 있어서도 이런 경험적 공식이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선한 해석과 음향이라는 긍정적인 쪽으로 이해된 것이다.


교향곡 9번은 말러가 1909년 미국 뉴욕에서 지휘생활을 하던 시절 작곡된 곡이다. 휴가 기간 동안 비교적 빨리 작곡된 이 곡은 느린 1악장과 4악장에 세계의 죽음을 관망하는 자로서의 말러 그 자신의 이미지가 배어 있다. 실제로 말러는 이 곡의 초연을 보지 못하고 2년 후 죽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1악장을 좋아한다. 흔히 현존재의 조건이자 공포를 몰고 오기도 하는 죽음, 그것으로부터 초연하고자하는 열망 같은 것으로 이 곡을 읽는다.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 무겁고 비장한 주제라면 이별이나 사라짐 정도의 단어로 대치하면 그 막막함이 조금은 경감될 수도 있다. 즉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 그리고 머지 않아 이 모든 것이 잊혀지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의 마음으로 들어보면 좋다.


30분 안팎으로 연주되는 1악장은 첼로와 호른에 의해 나지막하게 시작된다. 이어서 하프가 빈 공간 앞에 머뭇거리듯 들어온다. 두 개의 4분 음표 사이에 한 박자를 쉬는 그 규칙적 멈춤이 여백을 만든다. 바이올린과 호른이 주도하는 1주제도 빈 공간을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화선지에 찍은 먹이 어디론가 방향을 알 수 없게 퍼져가듯 음들이 부유하며 흩어진다. 특히 두다멜의 음반에서 LA필하모닉의 호른 소리는 오래 기억해도 좋을 만큼 인상적이다. 호른 주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찾아볼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LA필의 현악 파트도 상당한 수준의 기량을 보여준다. 말러가 하나의 바구니에 담고 싶어했던 삶과 죽음의 부조화가 현의 긴장과 이완 속에 완벽하게 표현된다.


실연으로 들은 LA필의 스트라빈스키 연주에서도 현악 파트의 단단함이 강하게 느껴졌다. 종결부에서도 호른과 첼로가 물결처럼 어우러지는 소리는 신비하다. LA필의 오보에의 긴 기다림과 종결의 피콜로까지 너무 무겁지 않게 처리한다. 죽음의 이미지와 연동된 심연을 원하는 쪽에서 보자면 무언가 석연치 않을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러 음악이 가진 복잡성에는 심연의 깊이만큼이나 표피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말러가 가진 복잡성은 그런 분열증적인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LA필하모닉과 탄탄한 기량의 남미 출신 두다멜이 만드는 매끈한 말러 9번 연주는 그런면에서 중력을 거스르려는 말러 상에 가깝다. 과연 두다멜과 LA필의 비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엄상준 KNN방송 PD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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