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강한 프로이센의 출발점은 개방 천명한 ‘포츠담칙령’

중앙선데이

입력 2015.11.0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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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28면

2 유대인 추방의 일환으로 1937년 11월 8일 독일 뮌헨에서 시작된 ‘영원한 유대인’ 전시회 포스터.

세계사는 종종 국가의 흥망성쇠로 기술된다. 부국강병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는 독일이다. 독일의 부국강병은 지금으로부터 꼭 330년 전인 1685년 11월 8일(그레고리력)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포츠담칙령을 공표한 날이기 때문이다.


포츠담칙령 공표 직전에 프랑스 루이 14세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 즉 위그노들은 외국으로 망명하려고 했다. 프로이센 발전을 위해 무엇보다도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자 각종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포츠담칙령으로 약 2만 명의 위그노와 유대인이 브란덴부르크로 이주했다. 이들에 의해 브란덴부르크 공국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사망 후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계승하여 개방정책을 이어갔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은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했고 공국의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다. 베를린 근위병광장에 오늘날에도 위용을 자랑하는 프랑스성당을 건립한 것은 이때 위그노들에게 제공한 여러 혜택 가운데 하나였다.

3 프랑스풍 상수시궁전에서 프리드리히 대왕(테이블 맨 왼쪽에서 다섯째로 앉은 사람)이 프랑스의 볼테르(맨 왼쪽에서 셋째로 앉은 보라색 코트) 말에 경청하고 있다. 아돌프 폰 멘첼의 19세기 작.

1685년 포츠담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프랑스위그노들을 환영하고 있다. 후고 포겔의 1884년 작.

외국 문물 도입 앞장선 프리드리히 대왕 이런 외국 문물의 수용은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 때 극에 달했다.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 때문인지 프랑스 문화를 동경했다. 황태자 시절 외국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심각한 불화를 가져올 정도로 지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이 직접 그린 도면으로 포츠담에 ‘근심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이름의 상수시궁전을 짓게 했다. 상수시궁전의 양식은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로코코 양식으로 언덕 위에 조성되었다는 점뿐 아니라 정원·숲·조각상 등이 프랑스 궁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프리드리히 2세는 궁전이 완성되자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낸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를 초청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궁전에서 볼테르의 편지를 낭독했고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2세의 편지를 파리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볼테르는 상수시궁전에 머물면서 역사서 『루이 14세기』를 완성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볼테르뿐 아니라 루소 등 다른 프랑스인들과도 교류했다. 상수시궁전 서재에는 2000여 권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대부분 프랑스어로 저술됐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당시 유럽의 귀족들처럼 프리드리히 2세도 독일어보다 프랑스어에 훨씬 익숙했다. 그가 쓴 저서들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4 독일 헤렌킴제궁전 거울홀.

문물 수용은 생산 차원으로 내재화해야


부국강병을 이룬 프리드리히 2세는 당시 민족국가의 개념이 없던 독일의 여러 작은 공국 사람들에게 독일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a의 여러 정치인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자신의 롤모델로 내세우면서 국민 지지를 동원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 등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적 인물 다수는 당시 프랑스 문물의 추종자였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을 이루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독일 힘의 원천은 프랑스 선진 문물의 적극적 수용이었던 것이다.

5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거울홀.

외국의 선진 문물을 무작정 받아들인다고 해서 부국강병이 될까? 바이에른 왕국은 프로이센 왕국과 더불어 독일의 대표적인 큰 영방이었다.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동경심에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독일 통일을 두고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루트비히 2세는 프랑스풍 궁전 건축에 몰두했다. 루트비히 2세가 지은 궁전 가운데 킴 호수의 작은 섬에 건축된 헤렌킴제궁전은 그가 얼마나 프랑스 궁전을 좋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금 부족으로 본관만 지어진 헤렌킴제궁전은 전쟁홀, 거울홀, 평화홀의 홀 배치 순서 등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양식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건물이다.


루트비히 2세의 재위 시절 바이에른 왕국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오스트리아 편에 참전했다가 패전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프로이센에 가담하여 독일제국 성립 후 연방에 편입되었다. 바이에른의 국력은 프로이센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프로이센의 외국 문물 수용이 궁극적으로 새로운 생산자로 자리매김이었던 반면, 바이에른 루트비히 2세의 문물 수용은 소비자에 머문 행위였다. 무조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부국강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 차원에 그치지 않고 생산 차원으로도 내재화해야 부국강병이 된다.


외국 문물의 적극적 수용으로 부국강병의 길로 가던 독일의 위기는 외국 문물의 배척에서 왔다. 포츠담칙령 공표 꼭 252년 후인 1937년 11월 8일, 나치 정권은 유대인을 인간세계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단정하는 ‘영원한 유대인’ 전시회를 개최했다.

1 1938년 11월 9일 ‘크리스탈 밤’ 중 파손된 독일 마그데부르크의 유대인 가게들.

다시 1년 후인 1938년 11월 9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크리스털처럼 빛나던 밤이라고 해서 흔히 ‘크리스털 밤’으로 불리는 날이다. 거의 100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었으며 약 7000곳의 유대인 가게가 파손되었다. 특히 독일에 살던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을 외국으로 내쫓았다.


나치 정권이 출범한 1933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에서 해외로 망명한 수는 10만 명을 넘었다. 이는 독일의 국부 유출이었고, 독일은 핵무기와 같은 첨단 군사기술에서 뒤져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독일의 흥성이 외국 인재의 국내 유입에서 왔다면, 쇠퇴는 국내 인재의 외국 유출에서 왔던 것이다.


프로이센과 달리 조선은 외국 문물 거부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을 위한 예비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인 1866년(병인년), 한반도에서도 종교적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에서 종교박해를 받던 위그노를 프로이센으로 유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달리, 조선의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을 응징하기 위해 7척의 군함을 출정시켰고 어려움 없이 강화도를 점령했다. 그 후 조선군은 프랑스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정족산성에 잠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49년 전인 1866년 11월 9일,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을 내세워 정족산성을 공략했지만 양헌수를 수성장으로 한 조선군이 이를 격퇴시켰다. 다음날 프랑스 함대는 철수했다.

병인양요 이듬해 흥선대원군이 강화도 해안가에 세운 비석. “바다 문을 지키고 있으니 타국선박은 삼가 통과할 수 없다”는 글이적혀 있다.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으로 잠입할 때 이용했던 경로는 덕진진이다. 덕진진 남쪽 끝 덕진돈대 해안가에 이른바 경고비로 불리는 비석이 하나 있다. ‘海門防守 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 타국선신물과: 바다 문을 지키고 있으니 타국선박은 삼가 통과할 수 없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흥선대원군은 경고비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척화비의 큰 글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극화 주화매국: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 주장은 매국이다)’ 12자이다. 척화비의 작은 글은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 만대 자손에게 알림 병인년에 만들고 신미년에 세움)’이다. 척화비를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웠다는 문구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1871년)를 외적에게 이긴 전쟁으로 본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만일 그런 무모한 착각을 한 게 아니라면, 이긴 전쟁인 양 국내에 호도한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오늘날 경고비 근처에는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참혹한 조선인 시신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과의 전투에서 실제 승리한 프랑스와 미국은 큰 이해관계가 없어 철수한 것인데, 조선 위정자들은 이를 전쟁 승리라고 우기며 개방하지 않고 쇄국을 고수하다 결국 강대국도 아닌 인접국 일본의 함대에 굴복하게 되었다. 개방이 아니라 쇄국이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웃 강대국의 종교탄압을 자국 성장의 기회로 삼아 개방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달리, 조선의 지배세력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국 내 종교 자유를 탄압했고 결과적으로 매국했던 것이다.


유방의 인재 중엔 세상이 버린 인물 많아루이 14세나 히틀러뿐 아니라 누구에 의해 퇴출되었다고 해서 다른 쪽에서도 반드시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남이 버린 것 가운데 가치 있는 것도 있다. 고물상이나 헌책방에서도 골동품이나 희귀본 서적을 건질 수 있다. 한나라 유방이 등용한 인재 대부분도 세상이 버린 인물들이었다. 남이 버린 인물들의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안목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유치가 늘 성공적으로만 정착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지방자치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어 온 지방의 유치 사업은 대체로 근시안적이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그리고 대규모 행사 등을 유치할 때에는 유치되는 측에서도 그 이주가 장기적 안목에서 더 나아야 한다. 지방으로 이전한 기관들 가운데 무늬만 지방 이전인 경우도 많다. 장기적 안목에서 이전이 해당 기관에 나은 선택이 아니라면 강제해봤자 오래가지 못한다.


모든 분야에서 열악한 국가도 비교우위의 분야는 있게 마련이다. 개방은 비교열위의 분야를 수입하고 비교우위의 분야를 수출하는 것이다. 다만 위정자들이 개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나라가 구조적 종속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이 쇄국보다 훨씬 더 나았음은 역사가 증빙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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