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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중국에 경사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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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유상철 기자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 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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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지난해부터 한국 외교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말이 있다.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중국경사론(中國傾斜論)’이 그것이다. 이 말의 국제적 유포엔 일본이 특히 열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 초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하느냐 여부를 놓고 한참 불거지더니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참석할 무렵 거의 절정에 오른 모양새였다.

 미국 조야에도 일본이 선전하는 한국의 중국경사론이 적지 않게 퍼져 있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지난달 박 대통령의 방미 때 열린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국제규범과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는 한국도 우리처럼 목소리를 내주기 바란다”고 말한 건 바로 그런 미국의 인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방미 최대 성과 중 하나로 중국경사론 불식을 꼽을 정도라 하니 이 말로 인한 우리 정부의 스트레스를 짐작할 만하다.

 한국은 정말로 중국에 기울어 있는가. 항변의 여지가 많을 수 있다. AIIB 가입은 철저하게 경제적 논리에 입각해 국익을 추구한 결과이며 중국의 전승절 참석 또한 북핵과 한반도 통일 문제 등에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의 안보 이익을 면밀하게 따진 소산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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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중국경사론이 유행을 탄 건 박 대통령 집권 이후 부쩍 가까워진 한·중 관계 때문이다. 한·중 밀착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정책의 복원성을 들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이명박 정권은 한·미 동맹 강화에 공을 들였다. 상대적으로 중국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새로 들어선 박근혜 정부가 그런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여기에 서로를 각별하게 배려하는 한·중 정상의 모습 또한 양국 관계 긴밀화에 일조를 하고 있다.

 또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지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내수가 발달된 일본과 달리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경우 그 수출의 4분의 1가량이 중국으로 간다. 중국 관광객 유커(遊客)가 오지 않으면 국내 관광산업은 고사 위기에 빠질 정도가 됐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의 한 대학의 경우 과거 학생 100명당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이 70명이었다면 현재는 80명가량이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한·중은 유가(儒家)의 깊은 영향을 받아 공유하는 가치가 많고 정서적으로도 가깝다. 이는 한류가 쉽게 중국에 진출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최근 한·중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 걸맞은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입장에선 중국경사론이 아닌 중국을 중히 여기는 중국중시론(中國重視論)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한데 일본에선 왜 중국경사론을 들먹이는 것일까. 여기엔 동아시아 주도권을 둘러싼 중·일의 치열한 다툼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지난달 동서대(총장 장제국) 중국연구소(소장 신정승)의 창립을 기념하는 한·중·일 국제 심포지엄이 부산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한 일본 학자는 현재 중·일 간의 갈등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미·일 동맹 강화에 따른 중국의 위기의식과 역사 문제, 영유권 분쟁 등이다. 반면 중국 학자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위의 세 갈등 요인은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지만 그 저간을 흐르는 중·일 갈등의 핵심은 ‘중국의 굴기를 일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2010년을 기준으로 세계 제2 경제대국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일본으로선 1968년 이래 42년간 지켜온 미국 다음의 지위를 잃었다. 아울러 일본은 아시아 역내의 리더란 자존심 또한 잃게 됐다. 문제는 이 같은 지위 하락을 일본이 심적(心的)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역내 주도권을 놓고 중국과 대결의식을 떨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연히 중국 견제에 힘을 기울인다. 여기서 중국의 부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미국과 이해가 일치한다. 그 결과가 미·일 동맹 강화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도 힘을 보태야 마땅한데 AIIB 가입이나 중국의 전승절 참석 등 한국의 독자적 행동이 일본으로선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과 아시아 리더 자리를 놓고 경쟁하겠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중국의 부상을 잘 이용하자는 중국활용론과 중국기회론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선 미·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국위협론이 크지 않다. 한국 입장에선 중국의 부상이 가져올 위험보다 역사를 반성하지 않은 채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이 더 걱정스러울 뿐이다.

 중국경사론은 일본이 만든 프레임이다. 그 때문에 한국으로선 미·중 사이에서 무슨 일을 하든 힘겹게 됐다. 미국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무조건 중국경사론의 누명을 뒤집어쓸 위험이 있다. 해법은 무엇인가.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중국경사론이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한국엔 중국중시론이란 용어만 있다고 말하면 된다. 물론 미국중시론과 일본중시론이란 말 또한 중국중시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첨언(添言)과 함께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