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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시작된 말 …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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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14면

이사크 레비탄이 그린 ‘안톤 체호프’(1886)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는 왜 끊임없이 문학 작품의 테마가 되는 것일까. 멀리서 보면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문학의 현미경으로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하나하나마다 절절한 ‘개별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빤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는 모두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이유로 시작되지만, 그 속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함, 그와 그녀만의 이야기, 세상 하나뿐인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안톤 체호프의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또한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진부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세상 하나뿐인 특별함을 머금고 있는 사랑 이야기다.


심리학자 오토 랑크는 『심리학을 넘어서』에서 프로이트와 융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 준다. 프로이트는 우리 모두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서로 비슷하다고 주장한 반면, 융은 우리 인간이 서로 다른 것은 바로 서로 다른 무의식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성욕의 동질적 메커니즘을 강조한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들을 ‘욕망’의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성욕을 인간의 수많은 욕구 중 하나로 상대화한 융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차이’였다. 바로 이 무의식의 개성,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발견이야말로 심리학의 경이로움이고 문학의 아름다움이며 사랑의 기적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바로 이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며 기존의 자아상을 끊임없이 무너뜨려 가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드미트리는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평범한 가장이지만 실은 엄청난 난봉꾼이다. 아내를 “천박하고 촌스럽다”고 비난하고,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으며, 걸핏하면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즐긴다. 남편 없이 혼자서 스피츠 한 마리를 데리고 얄타로 여행 온 여인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저 여자와 사귀어도 나쁘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대책 없는 바람둥이다.


이번에도 그는 홀로 여행하는 안나의 외로움을 쉽게 공략한다. 안나의 개에게 말을 걸고, 혼자 있는 그녀에게 말동무가 되어 주며,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과 아련한 회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은밀한 기쁨을 느낀다. “그녀에게는 어딘가 애틋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홀로 낯선 도시를 헤매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여자가 ‘아름답다’기보다 ‘애틋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다.

러시아 화가 알렉산더 브룰로프가 그린 19세기 러시아 여인.

애틋함에서 시작된 난봉꾼의 진짜 사랑드미트리는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지만 애틋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에게 여자들은 관능적인 존재로 다가왔을 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처음으로 여성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한 여자의 엉뚱한 질문, 수줍은 행동, 알 수 없는 표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드미트리의 눈길에 머쓱해진 안나가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요?”라고 질문하자,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키스한다.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 이 일상적인 질문이 ‘우리의 관계는 과연 어디로 치닫는 것일까?’를 묻는 철학적인 질문처럼 들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드미트리는 여인 앞에서 처음으로 부끄러움과 설렘을 느낀다. 연애 대장이었던 그에게 진짜 사랑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엄연한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만든다. 드미트리는 지금까지 여성을 ‘유혹의 대상’으로 취급했지만, 안나는 그에게 ‘깨달음의 주체’로 다가왔다. 안나가 자신이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현재의 삶을 벗어나고 싶은 탈출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온 드미트리. 그는 ‘낯선 남자에게 불가능한 사랑의 욕망을 느끼는 여자’를 통해 오히려 ‘그 여자를 유혹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오직 순간의 ‘스쳐가는 쾌락’으로 치부했던 여인들과의 만남이 이제 ‘나란 놈은 무엇인가?’를 아프게 자문하는 깨달음의 길이 되자, 그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된다. 하지만 그 사랑을 멈출 수가 없다. 그녀를 만나면 만날수록,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천천히, 그러나 명료하게 깨달아갔던 것이다.


호텔 방안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안나를 보자, 드미트리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린다. 안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쓸하게 늘어뜨린 채, 마치 오래된 그림 속 죄 많은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서글픈 얼굴로. “이제 더 이상 당신은 나를 존중하지 않겠지요.”


여인은 자신을 나쁜 여자라고, 천한 여자라고 자학한다. 사랑은 물론 남편에 대한 이해도 없이 스무 살에 덜컥 결혼한 안나는 노예처럼 일만 하는 남편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안나가 홀로 여행을 떠나온 것은 어떤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 “더 멋지게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제대로, 제대로 말이에요.”


하지만 바로 그 호기심, 여기가 아닌 저 너머에 다른 삶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꿈꾸는 그녀의 호기심이 자신을 파괴해 버렸다며 안나는 괴로워한다. 이 순간 드미트리는 안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린 절망과 공포, 그 밑에 수줍은 새싹처럼 조심스럽게 돋아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중언부언하며 ‘나는 타락했다’고 고백하는 순간, 나는 오히려 그녀의 순수를 보았다.”

안톤 체호프 우표. 왼쪽이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다.

“이젠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결국 안나가 떠나고 나서야 드미트리의 진짜 사랑은 시작된다. 다시 평소의 삶으로 쉽게 돌아올 줄 알았던 드미트리는 갑자기 다시는 예전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미친 듯이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그리워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아무런 대책 없이 안나를 찾아간다. 그가 진정으로 안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만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만나서 무얼 하겠다는 계획도 없이, 그저 제정신이 아닌 채로 그녀에게 찾아간 순간, 그는 ‘나’라는 이름의 단단한 장벽을 스스로 깨뜨린 것이다. 그것이 불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나답다’고 생각하던 이미지의 완전한 전복이기에, 그는 이 순간 결정적으로 변모한 것이다.


안나에게 지금까지는 ‘그리운 남자, 하지만 가질 수 없는 남자’였던 드미트리가 이제는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 버린 사람’이 되어 버린다. 두 사람은 이 불가능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결코 영원히 철들지 못할 어린아이들이었다. 결코 이런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사랑은 서로를 파괴할 뿐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소설은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들은 삶에 대한 권태 때문에 위험한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 자신’이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은밀한 사랑, 그것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무의식’의 풍경을 보여 주는 가장 투명한 거울이다. 융은 말했다. “사랑이 지배하는 곳에는 권력이 없으며, 권력이 지배하는 곳에는 사랑이 없다”고. 드미트리가 남녀관계에서 ‘권력’의 우선권을 쥐고 있었을 때는 결코 ‘사랑’이 자리할 자리가 없었다. 이제 내가 우선권을 쥐겠다는 열망이 사라지자, 그 권력의 빈자리에는 비로소 사랑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향한 끝없는 탐험, 그러나 위험한 탐험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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