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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불사르는 듯한 루이사다의 ‘쇼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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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27면

튀니지 출신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마르끄 루이사다.

가을 탓인지 오랜만에 쇼팽을 들어볼까 하고 음반을 뒤적이는데 공교롭게도 쇼팽콩쿠르 1위 입상 기사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손에 잡히는 음반이 모두 과거 1위 입상자들 음반뿐이다. ‘좀 색다른 연주는 없나?’ 그 음반들은 모두 연주 내용을 잘 아는 것들이다. 듣지 않은 음반이 눈에 띄었다. 여섯 명, 이른바 쇼팽 스페셜리스트 연주를 모아 놓은 것인데 역시 대부분 아는 이름이고 딱 한 사람 모르는 이름이 나왔다.

스타니슬라브 부닌.

장 마르끄 루이사다(Jean Marc Luisada·58). 우선 그의 마주르카 연주부터 들었는데 신선한 기운이 가미된 노련미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쇼팽 음악 중 마주르카는 특히 좋아하는 곡이다. 폴란드 농민생활을 모르면 마주르카를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말도 있는데 그는 이 민속 풍취 가득한 곡에 깊이 젖어 있는 연주를 한다. 여태 이런 멋진 연주가를 왜 몰랐지? 이런 의문이 생긴다. 사람들이 연주 실제보다 명성을 듣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가 큰 콩쿠르 입상으로 이름을 떨쳤다면 나는 이미 이름을 알았을 것이다. 찾아보니 1985년 쇼팽콩쿠르 5위라는 경력이 나온다. 그 해 1위는 부닌이다. 5위는 좀처럼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 때 모스크바 세르메쩨보 공항에서 루불화 동전 처리가 급하지 않았다면 나는 루이사다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2005년도에 귀국할 때 탑승 시간에 쫓겨 그때까지 주머니 가득한 동전을 급하게 처리하느라고 면세점에서 허둥지둥 구입한 음반 몇 장 가운데 이 음반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쇼팽 음반인 줄은 알았지만 연주가를 살필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십여 년 간 묵혀두다가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쇼팽 음악의 간판 격인 협주곡 1번을 루이사다 연주로 들었는데 이번에는 강한 열정과 도전적인 기세에 한층 더 매료되었다. 이 곡은 2번과 함께 콩쿠르의 파이널에 반드시 등장하는 곡이다. 1번은 2악장 로망스와 3악장 론도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루이사다의 연주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현악 5중주와 협연한 것인데 쇼팽 자신이 초기에 5중주 버전을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처음 듣게 된 5중주 버전은 거대 악단에 비해 한결 간결하고 음향의 윤곽이 선명해서 복잡한 오케스트라보다는 좀 더 효율적 구성이며 무엇보다 솔로 피아노를 크게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 오케스트라 버전은 시작부터 악단의 단조롭고 긴 서주가 전개돼 부담스런 느낌도 있었다.


장 마르끄 루이사다 얼굴을 보면 다소 도전적인 자유파의 기질 같은 것이 엿보인다. 그는 튀니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프랑스로 건너온 이력을 갖고 있다. 이런 이력이 쇼팽 음악에서 어떤 동질감을 찾았을까? 그는 글렌 굴드가 바흐에게 경도되었듯 내가 보기에 쇼팽 음악에 깊이 경도 되어 있고 그 음악에 자기 혼을 불사르듯 열정을 바쳐 연주한다. 2악장 로망스도 깊은 슬픔을 어루만지는 평온하고 차분한 톤으로 좋은 느낌을 주었지만 기교를 뽐낸다는 3악장 론도는 노련미와 패기가 잘 함축된 눈부신 연주를 들려줬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것이 연주의 특징이다. 너무 자주 들어 익숙한 가요의 가락처럼 신선할 것도 없는 협주곡을 이만큼 새롭게 들려준 연주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쇼팽 협주곡 1번에서 에밀 길렐스의 연주가 높이 평가되는 것도 다소 뜻밖이다. 길렐스 하면 무엇보다 베토벤 피아노 음악이 먼저 연상되는데 베토벤과 쇼팽 음악은 지향점이 달라 거리감이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베토벤에서 남성성을 유감없이 과시하던 길렐스는 쇼팽에서는 특유의 순도 높은 명확한 발성으로 여린 음까지 살려내 피아노 음악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쉽게 슬픔에 젖게 된다는 2악장에서도 감정의 범람 대신 절도 있는 톤으로 한층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에밀 길렐스는 아주 수용의 폭이 넓은 연주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부닌을 생각하면 그렇다. 부닌은 85년 콩클 입상 당시 쇼팽 해석의 완벽한 모습을 보인 드문 신인으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89년 2월 그가 세종문화회관에 등장했을 때 나도 추운 날씨에 몸을 떨며 그의 쇼팽 연주에 열광하던 관객 속에 앉아 있었다. ‘쇼팽을 이렇게도 즐거운 표정으로 연주할 수 있구나.’ 당시 내가 느낀 소감이다. 그런데 얼마 뒤 쇼팽으로 펄펄 날던 그의 베토벤 연주를 음반으로 들었는데 그것은 쇼팽을 듣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매우 곤혹스런 경험이었다. 연주가가 만능선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이 그렇듯 연주가도 선호하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에밀 길렐스처럼 폭이 넓은 연주가라면 더 많은 걸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다.


쇼팽 피아노협주곡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연주 성향이 바뀌는 걸 느낀다. 이번 수상자에게서는 깊이 감정에 젖어들기보다는 매 순간을 아주 간결하게 처리하는 신세대의 융통성 같은 걸 느꼈는데 좋은 자세라고 생각되었다. 콩쿠르에는 순기능도 있지만 가끔 스캔들이 튀어나오고 예술적 정진 보다 무리한 경쟁 조장이란 역기능도 있다. 콩쿠르는 끝이 아닌 시작이란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연주가가 장 마르끄 루이사다인 듯 하다. 그는 중년이 된 지금까지 쇼팽 연구와 후진교육에 열정을 바치고 있고 청년보다 더 발랄하고 도전적인 자세로 노련미가 가세된 뛰어난 쇼팽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송영 작가sy400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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