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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농사 끝난 이 가을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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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27면

세속을 떠난 수행자들은 추석이나 설이 되면 새벽 법당을 나서며 고향에 계신 부모님 또는 고향의 산소를 향해 조용히 망배(望拜)를 한다. 망배는 갈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 숙여 절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먼 길을 떠나는데 인사를 드릴 수 없을 때 망배로 마음을 달랜다. 망배에는 “함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는 뜻도 있다. 세상에 마음을 함께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없다. 두려움과 괴로움, 슬픔도 함께 나누어야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한다.


올 추석엔 미국으로 이민 떠난 큰 형님과 함께 돌아가신 부모님께 과일상을 차리고 인사를 했다. 형님은 일흔이 넘으면서 한 해가 멀다하고 미국과 한국을 왔다갔다 하신다.세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홀로 4형제를 키우셨다. 어머니마저 20년 전 돌아가시고, 남은 형제들은 함께 늙어가며 서로의 얼굴에 있는 주름살을 헤어본다.내 책장 옆에 이런 싯귀가 걸려 있다.


늙어가면서 꿈은 놀라 자주 깨이나니등잔불 깜박이며 한밤이 지나가네베개를 매만지며 듣는 파초우여이때의 심정을 뉘와 더불어 말하리(석지현 ‘선시’)


지난주 대전 집에 큰형님이 오셨다. 가을 붉은 홍시를 드렸더니 갑자기 형님의 목이 메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효도 못하고 감 하나 제대로 사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해 “미국에서도 내 맘대로 감 하나를 사먹지 못했다”면서 말이다. 자책에 목이 멘 형을 보니 괜히 나의 가슴도 젖어들었다. 형님은 요즘 좀처럼 듣기 힘든 말, ‘못다한 효(孝)’를 안타까워하며 말씀마다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있었다.


모임에서 누군가 말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다고 해도 옛날 어릴 때 어머니가 끊여주신 김치찌개 맛이 나지 않아. 그리고 된장국 아욱국도 그 맛을 내는 사람이 없어.” 고향도 잊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맛도 잊지 못한다. ‘맛의 귀소본능’이리라 짐작했다.


내가 모시는 스승님은 항상 “세상에 뭐니뭐니 큰소리 쳐도 효도하자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없으니 동양의 문화가 깨졌다”며 걱정을 한다.


교무로 살아오며 정을 붙이지 않고, 무심하고 때로 냉정한 것이 몸에 배었는지 주변 사람들은 나를 ‘고집 센 중’으로 보기도 한다. 고백하건데, 나도 때로 담백하고, 정이 있고 또 되돌아서 부족했던 마음을 참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공자님이 하루에 세 번 자신을 되돌아 살핀다 했는데, 어찌 보면 나의 일생이 그렇지 않았나 싶다.


붉은 단풍이 지고 서리가 내리는 가을이다. 들녘은 텅 비어 간다. 또 한 해 마음 농사를 끝내 빈 들녘이 된 내 마음에도 서리가 내린다.


정은광 교무dmsehf443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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