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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통 기자단 따라잡기] 왕들은 왜 토지·곡식 신에게 제례를 지냈을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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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아니 되옵니다. 종묘사직이 흔들리는 일이옵니다.”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
사극에서 신하들이 고개를 숙이고 왕에게 간청하는 장면에 종종 나오는 대사죠. 조상에게 제례를 올리는 종묘와 자연의 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사직. ‘종묘사직’이 이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종묘 답사에 이어 사직단 답사에 나선 역사통 기자단 2기 친구들은 그 비밀을 풀 수 있을까요? 조선시대 건국이념을 따라가는 역사통 기자단 2기의 두 번째 답사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삼국시대에서도 신성시한 사직

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카툰캠퍼스가 함께하는 역사통(通) 기자단 #사직단

“토지의 신은 땅이 넓어 다 공경할 수 없으므로 흙을 모아 ‘사(社)’로 삼아 그 공에 보답하고자 함이요. 곡식의 신은 곡식이 많아 널리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 ‘직(稷)’신을 세워 이를 제하는 것이다.”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에게 제례를 치르는 신성한 공간인 사직단 앞에서 고려의 6대왕 성종은 이처럼 말합니다. 여기서 잠깐,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고려는 불교를 신봉하던 사회였는데 갑자기 왜 유교사상의 기본인 ‘종묘’와 ‘사직’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정략결혼을 통해 지방 호족 세력을 모으는 데 성공하고 삼국을 통일합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 때문에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게 된 왕건은 왕권중심의 강력한 왕조를 세우는 데는 실패하죠. 태조부터 경종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정치적 혼란을 겪은 고려왕조는 성종 때가 돼서야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종묘와 사직을 세우면서 혼란을 잠재우고 왕권중심의 정치체계를 확립합니다. 고려시대 유교는 정치 질서를 확립하는 역할을 하지만, 백성들의 삶 깊숙이 뿌리를 내리진 못합니다.

사직단의 역사는 삼국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사직과 그의 땅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고구려는 왕궁 왼편에 큰 집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겨울에는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낸다’고 기록돼 있죠.

이처럼 까마득히 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왕들이 직접 사직에 제례를 올리는 이유는 뭘까요. 고대사회에서 경제의 핵심은 ‘농사’였습니다. 백성은 굶주림 없는 나라를 최고로 생각했고 민심이 그해 농사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사단과 직단으로 나뉘는 사직단

조선 중기 목조 건물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직단 정문(보물 제177호) 앞에서 문화유산국민신탁의 김진형 연구원의 설명으로 답사가 시작됐습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1395년 한양을 수도로 삼고 경복궁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지었습니다. 중국고대 왕조의 도성 건설에 기본이 되는 『주례』 고공기 편에 적힌 ‘좌묘우사’를 따른 것이죠.”

사직단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뉩니다.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물의 신인 ‘직(稷)’을 모시는 단이 있는 곳과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죠.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은 다시 왕과 왕세자가 제례를 준비하는 곳과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뉘는데, 음식을 준비하던 공간은 현재 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사직단 답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정문을 넘어서면 성인 키보다 낮은 높이의 울타리로 둘러싸인 사직단이 한눈에 보입니다. 이 울타리는 ‘유’라고 부르는데 속계(사람들이 사는 세속의 세계)와 성계(신이 사는 성스러운 세계)를 구분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형식이죠.

사단과 직단을 네모반듯하게 유로 둘러싼 첫 번째 공간에는 사방(동·서·남·북)에 홍살문이 나있습니다. 그 형식은 첫 번째 공간을 유로 둘러싼 두 번째 공간도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동·서·남쪽의 문인 동신문·서신문·남신문은 일반적인 크기의 한 칸 문이지만 북신문만 세 칸 크기의 3문 형식으로 돼 있다는 것이죠. 북신문은 신이 들어오는 문으로 성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3문 형식으로 만들었지요. 북신문을 따라 들어가면 왕도 다닐 수 없었다는 신로(神路)가 사단과 직단이 있는 첫 번째 공간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폐지된 사직제례

사직제례는 종묘와 함께 길례(상례와 장례를 제외한 조선의 다섯 가지 중요한 제사) 대사 중에 하나입니다. 국가의 중요한 의식으로 왕이 직접 제례를 올렸고 일 년에 세 번, 봄·가을·동지 무렵에 지냈습니다. 또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제례를 지냈는데 인조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계속되는 변란은 천지신기의 노함이니 특별히 제문을 지어 서울과 지방 사직에 제사를 지내자’는 비변사의 청으로 제례를 올렸고 숙종은 흉년이 심해지자 전에 없던 기곡제를 지냈습니다.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하는 고유제를 사직단에서 거행했죠.

왕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7일 전부터 제례의식을 준비했습니다. 4일 동안은 슬픈 일을 묻거나 듣지 않고 즐기는 일을 하지 않으며 행동과 마음을 근신하는 ‘산재’의 시간을 보냈고 3일 동안은 오로지 제례에 관한 일만 맡아 보는 ‘치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치재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비로소 사직단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사직단은 종묘와 달리 지방의 행정단위별로 설치가 가능했습니다. 왕을 대신해 지방 수령이 제례를 올리기도 했죠.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350여 개나 되는 사직단이 있었습니다. 사직단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입니다. 1908년 일제는 강압적으로 사직제례를 폐지하고 정원과 산책로를 조성해 공원으로 바꿨습니다. 이후 최근까지 사직단의 수모는 계속됐습니다. 사직단 앞 도로가 확장되고 사직터널이 생기면서 사직단 정문은 두 번이나 옮겨졌고 사직단 안에 수영장이 생기기도 했죠. 사직단은 1985년이 돼서야 복원사업을 통해 오늘날 모습을 찾게 됩니다. 사직제례는 1988년 왕가의 후손인 전주 이씨 대동종악원의 주관으로 부활해 해마다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됐습니다.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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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별 역사통 기자단 2기 |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유를 허물고 사직단을 사직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해요. 500년을 이어온 중요한 문화재가 순식간에 훼손된 것이죠. 답사를 하는 내내 마음이 아팠어요. 앞으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잘 알고 보존하며 지켜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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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역사통 기자단 2기 |

“사직단 정문은 보물 177호로 지정돼 있어요. 정문을 옆에서 보면 선조의 뛰어난 건축기술이 한눈에 들어오죠. 기와가 올라간 무거운 지붕을 균형감 있게 설계했고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로 나무 기둥이 썩지 않도록 각도를 조절했죠.”

글=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동행취재=역사통 기자단 2기(화성 석우중),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 문화재청, 해설=김진형 문화유산국민신탁 연구원 진행=이민정 기자, 권소진 인턴기자, 김진형 문화유산국민신탁 연구원, 강철웅(한국전통문화대 4)·김지호(한국외대 2)·송윤아(한국외대 2)·이현정(한국외대 1)·오나영(이화여대 1) 대학생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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