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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고구려는 동북아 문화용광로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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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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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쑤저우(蘇州)의 서쪽 관문 역할을 했던 누각 철령관(鐵鈴關). 명나라 때인 1557년 군사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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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중국 일기 1~3
김용옥 지음, 통나무
각 권 352쪽
각 권 1만9000원

유가(儒家)적 삶은 고달프다. 끊임없이 스스로 강해져야 하고(자강불식·自强不息), 쉼없이 지극 정성으로 살아야 한다(지성무식·至誠無息).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삶, 그게 유가 경전 속 ‘군자(君子)’의 모습이다. 인간은 원래 죄인이요, 나약한 존재이기에 쉽게 신(神)에 의지하는 기독교적 인생과는 크게 다르다. 사상가 도올 김용옥은 그런 유가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수많은 저술과 대중 강연을 통해 새로운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한다. 치열한 삶이다.

이번엔 고구려다. 『도올의 중국 일기』는 그가 지난해 9월 7일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공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되는 일기 형식의 중국 체험기다. 옌벤(延邊)대 강의를 위해 간 길이었다. 3권이 나왔고, 곧 3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1권은 강의를 중심으로 옌지의 생활상을 서술했지만 2, 3권의 주제는 고구려다.

그렇다고 2, 3권이 딱딱한 역사책은 아니다. 탐방 사진을 크게 배치했고, 해설과 스토리를 넣었다. 우선 재미있다. 유리왕의 로맨스, ‘돼지 여인’이 왕비가 된 사연, 고국원왕의 와신상담 스토리 등 흥미진진하다. 사진 찍다 보안요원에게 걸려 파일을 지워야 했던 일, ‘옥수수깡 보일러’의 힘으로 달리는 북한 트럭을 보고 놀란 일, 거리 상점에서 책을 샀다 바가지 쓴 일 등을 읽노라면 함께 여행하는 듯한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도올 김용옥은 “역사는 발로 밟아보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문헌만으로 역사를 말한다면 역사에 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얘기다. 고구려 역사 밟기는 시조 주몽이 도읍지로 선택한 지린성 환런(桓仁)에서 시작해 국내성·장군총·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는 지안(集安)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발 한발 내딛여 얻은 그의 결론은 ‘고구려는 고구려일 뿐이다’라는 것이었다. 대륙 중원의 변방이 아닌 고구려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광개토대왕비 비문을 들어 ‘고구려가 지배 대상으로 하는 나라들은 중원이 아닌 백잔(백제)·신라·부여·왜(倭) 등 한반도 지역과 요동, 일본 등의 영역에 펼쳐져 있다’고 봤다. 산해관 너머 중원을 바라보지 않았고, 독자적인 자기 중원문화를 창조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또 “고구려는 중원축이 아니라 고조선축이었다”며 “전성기의 장수왕이 평양 천도(427년)를 단행한 것 역시 압록강 이남의 세계를 자기 코스모스로 생각했기 나온 결정”이라고 봤다. 그의 주장에서 고구려를 중원 정권의 변방 속국으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성립될 수 없다.

동북공정 자체는 냉철하게 봤다. 그는 “중국 사람의 입장에서 현재 중국강토 내의 역사를 타국의 역사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다”고 썼다. 다만 고구려의 가치를 민족국가적 편협한 경계로만 보고 있기에 왜곡되고 있다고 일침을 놨다. 고구려 역사 논쟁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동북공정을 ‘동북사랑운동’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동북지역을 아시아의 새로운 허브로 만드는 개방적 문화 정책을 수립하라는 주문이다.

“고대사는 민족사가 아닌 문화사가 되어야 한다. 누가 그 모습을 더 충실히 이해하고, 그 역사로부터 피끓는 교훈을 얻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고구려는 일본의 역사 왜곡이 시작된 지점이기도 하다. 일본은 조선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에 시멘트를 발라 비문을 왜곡했고, 원문도 제멋대로 해석했다. 최근 일본 문부과학성이 승인한 중학교 교과서에 ‘왜(倭)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적고 있는 것도 광개토대왕비문의 왜곡된 해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한학자이기도한 저자의 해석에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고구려는 이렇듯 한국과 중국, 일본의 역사 갈등이 겹겹이 쌓여있는 곳이다.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할 것인가. 저자는 동북을 인류문명의 통섭의 장으로, 그 통섭의 메인 패러다임을 고구려라는 문화축으로 이해하려는 인식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부활시키는 사고의 틀을 고구려에서 찾자는 얘기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고대사 연구가 소수 학파들이 벌이는 지저분한 논쟁의 울타리에 갇혀있다”고 한탄한다. 실증사학을 운운하는 자들의 가벼운 비판, 일제 관변사학의 뿌리를 계승한 사학도들의 배척, 국수주의적 사유를 내세우는 졸렬한 교조주의 등으로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고구려를 지저분한 논쟁의 울타리에서 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이 고대사의 품덕과 기개를 체득하도록 바른 교육을 해야한다. 국사는 국혼이요, 국혼은 세계사의 중심으로서의 나의 비전을 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라를 갈라놓고 있는 역사 교과서 논쟁에도 많은 걸 시사하는 책이다.

[S BOX] 광개토대왕비 지킨 중국인

일제는 지안(集安)의 광개토대왕비를 여러 차례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우광궈(吳光國) 현(縣)지사가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반출을 최초로 시도한 자는 이 비를 조선지배의 합리화 도구로 삼으려던 동경제국대의 동양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였다. ‘집안현향사지(輯安縣鄕士志)’에 따르면 1900년대 초 시라토리는 여러 차례 지안을 방문해 우 현지사에게 판매를 제의했다. 우 현지사는 그러나 “이 비는 고구려 역사를 실증하는 유물이요, 국보이기 때문에 국외로 유출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우 현지사가 끝내 거부하자 일본 군이 나서게 된다. ‘집안현향사지’는 “광서(光緖) 33년(서기 1907년) 일본 57연대장 오자와 도쿠헤이가 군사를 이끌고 와 험한 말로 광개토대왕비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고 적고 있다. 우 현지사는 “설사 내가 판다고 해도 일본으로 가기 전에 바다에 침몰하고 말 것”이라며 요지부동이었다. 오자와는 결국 탁본 몇 장을 받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도올 김용옥은 “20세기 초기 일본 지성계와 정치계는 조선 식민지배를 위해 광개토대왕비를 활용했다”며 “비문 왜곡은 일본 역사 왜곡의 원조”라고 책에 쓰고 있다.

한우덕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han.wood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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