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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16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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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1 면

아나키즘은 그리스어의 ‘아나르코(anarchos)’에서 나온 말로서 ‘없다(an)’와 ‘지배자(arche)’라는 뜻의 합성인데, 글자 그대로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아나키즘은 각 개인, 각 지방, 각 조직이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 속에서 서로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아니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국내에서 실력양성론이란 민족 개량주의 노선으로 나타난다. 이에 한계를 느낀 재일 유학생들은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조선총독부와 일경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아나키즘 조직이었다. 직접행동을 주창하기 때문이었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결성된 조선고학생동우회(苦學生同友會)는 아나키즘 색채가 짙은 단체였다. 1921년 10월 김약수·박열·김사국 등이 조직한 ‘흑도회(黑濤會)’도 아나키즘 색깔인 흑색(黑色)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나키즘 조직이었지만 결성 직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김약수 등과 노선갈등을 겪다가 박열·정태성·홍진후 등이 따로 흑우회(黑友會)를 결성했다.


박열·홍진유 같은 20대 초반의 고학생들이 흑우회를 결성하고 김약수·김종범 같은 20대 후반~30대의 유학생들이 북성회를 만들었다는 특징도 있다. 흑우회에는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 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도 함께했다. 박열은 흑우회 기관지 ‘후테이 센징(太い鮮人)’을 1923년 3월부터는 보다 온건한 제목의 ‘현사회(現社會)’로 바꾸어 발행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직접행동가’였다. 그는 일왕(日王) 및 주요 인사들이 모이는 곳에 폭탄을 터뜨리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았다.


9월 1일 낮 12시 도쿄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0만5000여 명이 사망하고, 10만9000여 동이 무너지고, 21만2000여 동의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인들이 공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그날 오후부터 돌연 “조선인이 방화했다”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다. 일본 각의는 이날 밤 계엄령을 발동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일본 내무성은 ‘어딘지 모르게 흘러나온 조선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다. ‘도쿄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 9월 3일자에 “불령선인(鮮人) 각소(各所)에 방화, 제도(帝都)에 계엄령 선포”라고 보도했다. 아이치현(愛知縣)의 ‘도요하시(豊橋)일일신문’ 9월 5일자는 “대화재(大火災)의 원인은 지진도 있지만 일면에는 불령선인 수천 명이 폭탄을 투하하고 시중에 방화한 데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대지진의 공포를 한인과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 등으로 돌리려는 일본 극우세력의 조직적 음모였다. 이 때문에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부부 등이 헌병 장교에게 살해되고 일본 노동조합 간부들도 살해되었다. 일본 군부와 경찰은 9월 3일부터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한인들을 검속했다.


1923년 9월의 도쿄대지진, 곧 관동(關東)대지진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계엄사령관은 군부 실력자 후쿠다 마사타로(福田雅太郞·1866~1932) 대장이었다. 일본 극우파는 대지진 때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재일 한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직접 혁명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들의 동향을 일제가 주시하는 와중에서도 27년 평안도 지역에서는 관서흑우회가 만들어지고 29년 11월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출범했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은 평양의 여성 사회사업가였던 ‘백선행(白善行) 기념관’에서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 대회를 개최하고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려 했지만 일제가 집회를 불허하자 평남 대동군 기림리 공설운동장 북쪽 송림에 전격적으로 모여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 것이다. 전국의 아나키스트들이 평양으로 집결하자 일경은 역과 여관 등지를 대대적으로 검문해 타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들을 체포하거나 평양 밖으로 추방했다.


이처럼 국내에서 일제의 그물 같은 경찰망 때문에 활동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자마자 와해되는 것도 일제의 탄압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국외에 근거지를 둔 채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하는데 그런 대표적인 조직이 1919년 11월 10일 길림 파호문(巴虎門) 반씨객점(潘氏客店)에서 결성된 의열단(義烈團)이었다. 의열단의 이념은 아나키즘이었지만 그 창립 배경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항일투쟁 단체인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가 있었다. 1919년 2월 말 길림에서 여준·조소앙·김좌진 등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하 의군부)를 결성하는데, 의군부는 대한독립선언서에서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 것을 결의한 군부(軍府) 조직이었다. 의군부는 그해 4월 이상룡·유동렬·조성환·이장녕 등과 연합해 조선독립군정사(군정사)로 조직을 확대하는데, 군정사가 의열단 결성에 깊숙이 개입했다. 군정사 대표로 임정 수립에 참여하러 상해로 갔던 조소앙은 이동녕·이시영 등과 1919년 4월 ‘급증하는 망명 청년들의 예기(銳氣)를 한 곳으로 응집’시킬 목적으로 상해 공동조계 내에 비밀리에 폭탄 제조 학습소 겸 권술(拳術)수련소를 설립했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상해에서 의열단원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는 “이 단체(의열단)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었다”라고 회고했다.


1922년 3월 의열단이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의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사건은 상해는 물론 전 중국과 일본, 한국까지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일본 총영사관은 자신들이 관할하는 공동조계는 물론 한국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조계에도 압력을 넣어 한국 독립운동을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의 경찰 당국은 ‘불온행동’ 단속 강화의 방침을 공포했다. 골자는 한인 독립운동가의 총기류 휴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중(駐中) 미국공사 샬먼은 상해에서 조선으로 향하면서 “조선인 독립당(獨立黨)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의 행함과 같은 잔혹한 수단으로 나오는 데 대해 미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든지 찬성치 아니하는 바이다”라고 유감의 뜻을 표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의열단에 대한 상해의 외국인 여론을 악화시켰는데, 문제는 여기에 임시정부까지 가세한 것이었다.


동아일보(1922. 4. 7)는 상해 임정이 “세관 부두의 폭탄사건(다나카 저격사건)에 대해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는 하등의 관계가 없으므로 저들의 행동에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성명을 냈다고 보도했다. 또 임정 측 관계자가 “독립정부 측과 저들은 하등의 관계가 없으며 조선독립은 과격주의를 채용하며, 공포수단을 취하여 달할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의열단은 격분했다. 자신들은 박재혁·최수봉이 사형당하고 김익상·오성륜이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관계 없다’고 선을 긋고 나서는 데 분노한 것이다. 의열단은 자신들이 무차별적 테러단체가 아니라 명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임을 내외에 천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김원봉과 유자명은 북경의 신채호를 상해로 초빙해 의열단의 주의·주장을 담은 선언문 작성을 요청했다. 신채호 역시 의열단의 직접행동을 지지하고 임정의 외교독립론에 부정적이었으므로 흔쾌히 수락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의열단 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國號)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조건의 필요성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하는 ‘조선혁명선언’은 ‘식민지 민중이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수단은 정의롭다’고 선언했다.


‘조선혁명선언’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에서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우리 민족이 한 발자국의 행동도 임의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라며 일제 식민통치의 가혹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뿐 아니라 “내정독립이나 참정권이나 자치를 운동하는 자가 누구이냐”라면서 국내의 친일파나 개량주의자들의 타협노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일제를 완전히 구축하고 독립을 쟁취하자는 게 혁명노선이라면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부분적인 정치적 권리를 얻자는 것이 개량주의 노선으로서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 참정권론, 자치론 등이 있었다. 신채호와 의열단은 이런 노선들은 친일파와 개량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기 위한 투항노선이라고 보고 있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일본 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는 자가 누구이냐?”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나 강도 정치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나 다 우리의 적(敵)임을 선언하노라”고 규정하고 있다. 내정독립론자, 참정권론자, 자치론자 모두 자신들의 적이라는 선언이었다.


세 번째 부분에서 ‘조선혁명선언’은 외교독립론과 준비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외교독립론에 대해 “이들(외교독립론자)은 한 자루의 칼, 한 방울의 탄알을… 나라의 원수에게 던지지 못하고, 탄원서나 열국공관(列國公館)에 던지며, 청원서나 일본 정부에 보내어 국세(國勢)의 외롭고 약함을 애소(哀訴)하여 국가존망·민족사활의 대문제를 외국인, 심지어 적국인의 처분으로 결정하기만 기다리었도다”라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준비론에 대해서도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신채호와 의열단은 “이상의 이유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 등의 미몽을 버리고 민중 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라고 선포했다.


네 번째 부분에서 신채호와 의열단은 “강도 일본을 구축하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구축할 방법이 없다”며 혁명이 유일 수단이라고 선언했다. 의열단의 혁명론은 민중혁명론이었다. 다음은 신채호와 의열단의 주장이다. “구시대의 혁명으로 말하면, 인민은 국가의 노예가 되고 그 위에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어 그 소위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함에 불과하였다. 금일 혁명으로 말하면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 고로 ‘민중혁명’이라 ‘직접혁명’이라 칭한다. 오직 민중이 민중을 위하여 일체 불평·부자연·불합리한 민중 향상의 장애부터 먼저 타파해야 한다.” 같은 민족, 같은 국가 내에 어떠한 차별과 억압이 없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 부분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이 갖고 있는 아나키즘적 요소다.


신채호는 ‘민중’과 ‘폭력’을 혁명의 2대 요소라면서 폭력(암살·파괴·폭동)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했는데, “1 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 일본 천황 및 각 관공리, 3 정탐노(偵探奴)·매국적(賣國賊), 4 적의 일체 시설물”이 그 대상이었다. 또한 ‘이민족 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균형’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대상으로 규정했다.


‘조선혁명선언’은 “이천만 민중은 일치로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면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해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끝맺었다.


1923년 1월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자 일제는 크게 놀랐다. 간도 총영사 스즈키(鈴木安太郞)와 만주 해룡(海龍)현의 영사관 분관 주임 다나카(田中繁三)는 각각 1923년 5월과 7월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에게 ‘불온인쇄물 조선혁명선언의 반포를 개시한 건’ 등의 보고서에서 “‘조선혁명선언’이 만주 지역에 배포되고 있다”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의열단선언문’이라고도 불리는 ‘조선혁명선언’에 정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국어, 국사 교육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집필자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이기 때문이었다. ‘조선혁명선언’은 “자녀가 나면 ‘일어(日語)를 국어(國語)라, 일문(日文)을 국문(國文)이라’ 하는 노예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왜곡)하여 소전오존(素嗚尊·스사노오노미코토: 일본 고대의 삼신(三神) 중 하나)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 한 일본놈들의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 정치를 찬미하는 반(半) 일본화한 노예적 문자뿐이며…”라고 일제의 국어·국사 교육을 강하게 비판했다.


일제는 1916년에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이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식민사학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고대사의 경우 단군 조선을 부인하는 한편 한(漢)나라의 식민통치기구였다는 한사군(漢四郡:낙랑·진번·임둔·현도)의 위치를 한강 이북이라고 강변했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일본의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있었다고 주장해 남북 모두를 식민지라고 창작했다. 그런데 이상룡(李相龍)이 1911년 2월 만주로 망명하면서 쓴 기행문 ‘서사록(西徙錄)’에는 수서(隋書)를 인용해 ‘한사군은 압록강 이서(以西)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이상룡뿐만 아니라 조선의 성호(星湖) 이익(李瀷)도 ‘조선사군(朝鮮四郡)’에서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한강 이북 지역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제 식민사학의 중국판 버전에 불과하며 아직도 이를 추종하는 국내 식민사학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후신에 불과하다.


이회영은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大同)의 세계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말했는데, 공자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말한 대동(大同)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고루 잘사는 사회를 뜻한다. 한국 아나키즘이 해외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수입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 사상 속에서 그 장점을 수용했다는 뜻이다. 이회영은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규정짓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면서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때로 한 개인의 결단이 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데, 김종진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김종진은 만주로 가서 김좌진과 함께 아나키스트와 민족주의자의 연합기구인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북만주에 이상촌 건설을 시도한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76호 2012년 6월 24일, 제277호 2012년 7월 1일, 제278호 2012년 7월 8일, 제279호 2012년 7월 15일, 제280호 2012년 7월 22일, 제281호 2012년 7월 29일, 제282호 2012년 8월 5일, 제283호 2012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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