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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곳 같은 만화, 솜방망이 같은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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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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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

‘나는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

 강렬한 독백이 귀에 꽂혔다. 인기 웹툰이 원작인 JTBC 드라마 『송곳』의 한 장면이다. 드라마 주인공 이수인(지현우 분)은 모두가 ‘예스(YES)’라고 할 때 ‘노(NO)’를 말하는 사람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 보일 때도 숙명처럼 소신과 원칙을 택했고, 결국 왕따가 되기를 반복한다.

 고교생 때는 촌지를 원하는 담임 교사의 눈짓에도 항의했고, 육군사관학교 4학년 때는 부재자 투표 부정을 고발했다. 매질과 징계가 뒤따랐다. 늘 삐져나오는 인생이 송곳을 닮아서 드라마 제목이 된 것이다. 반골 인생에 스스로도 지쳐버린 주인공의 자조 섞인 혼잣말은 솔직 담백했다.

 대형마트 과장으로 일하게 된 주인공은 회사의 불법 해고 지시에 역시 반대를 택했다. 회사가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듯 왕따를 시키자 다시 독백한다.

 "내 발로 알아서 치워져 줄 마음은 조금도 없다. 날 치워봐라.”

 갑의 횡포에 맞서는 을의 뚝심과 좌절, 약자들의 연대가 드라마의 흥행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힘 있는 독백은 탄탄한 스토리와 맞물려 강렬한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지만, 잘 쓰인 대사들은 사회의 지성을 송곳처럼 찌른다.

 드라마 속 또 다른 주인공인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안내상 분)은 노동운동의 한복판에서도 외과의사 같은 냉정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라는 대사는 압권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동정도, 기업에 대한 막연한 분노도 없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픽션이 던지는 메시지가 현실의 표현력을 넘어서고, 오히려 현실을 적나라하게 짚어낼 때 정치권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 고품격 웹툰에 익숙해진 청년들과 국민 앞에 정치권은 어떤 말을 던지고 있는가.

 최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속에 등장하는 말들은 그들 앞에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교육부의 교과서TF 사무실을 찾아나선 야당 의원들은 ‘화적 떼’로 불렸고, 국정화 반대론자들에겐 ‘적화통일 세력’이라는 빨간 칠이 덧씌워졌다.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의원들에게 ‘친박 실성파’라는 험한 별명을 붙였다. 날카로움도, 호소력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솜방망이 싸움일 뿐이다.

 지난 27일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 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1만2200여 자(字), 연설 시간 40분, 경제 언급 56회, 지난해보다 3회 증가…. 해부학적인 분석까지 나왔지만, 가슴을 울리는 목소리였다고 회자되는 문장은 없는 것 같다. 대신 대통령의 ‘레이저 눈빛’과 손짓이 반향을 남겼다. “역사 왜곡이나 미화가 있는 교과서가 나오는 것은 저부터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메시지에 어울리기는 했지만, 송곳처럼 가슴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