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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무기징역 재일동포와 내연녀 20년만에 재심 결정으로 석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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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먼 외국 땅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꿈 같은 경치가 빛나고 있습니다.”

20년 전 일본인 내연녀와 공모해 그의 딸을 방화 살해한 혐의로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됐던 재일동포 박용호(49) 씨가 26일 법원의 재심 및 형집행 정지 결정에 따라 석방됐다. 내연녀였던 아오키 게이코(靑木惠子ㆍ51) 씨도 이날 풀려났다. 두 사람의 석방은 오사카(大阪) 고등재판소(고법)가 지난 23일 재심 및 형집행 정지를 결정한 데 이어 이날 검찰의 형집행 정지 이의신청을 기각하면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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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아오키씨와 공모해 1995년 7월 오사카시 히가시스미요시(東住吉)구에 있는 집 차고에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붙여 목욕중이던 아오키씨의 딸(당시 11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2006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당시 딸은 1500만엔(약 1억5000만원)의 생명보험에 가입해 있었고, 대법원은 두 사람이 보험금 때문에 딸을 살해한 것으로 인정했다. 박 씨가 수사단계에서 “차고에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고 자백한 것이 형 확정의 근거였다.

그러나 두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강압 수사로 자백을 강요당했다며 무죄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형 확정 3년만인 2009년에는 오사카 지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재심 결정을 끌어냈다. 오사카 고법은 이번에 다시 지법의 결정을 지지했다. 고법은 판결에서 “화재는 방화가 아니라 차의 가솔린 누출로 인한 자연 발화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무죄의 가능성이 높아진만큼 형 집행을 계속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고 밝혔다. 또 자백의 신뢰에 대해서도 “가계 사정 등으로 봐서 부자연스럽다”고 판시했다.

법원의 이 판단에는 변호인단이 실제와 차이가 없는 모형 차고와 차량을 가져다놓고 방화 실험을 한 결과, 박 씨의 자백이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박씨의 어머니도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해왔다. 그녀는 지난 23일 “아들이 죄가 없기 때문에 거짓 자백을 해명할 수 있다고 믿고 지금까지 싸워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법정 투쟁에는 일본 시민들의 도움도 함께했다. 박용호씨는 이날 눈물을 흘리며 “자유의 몸이 돼 정말로 감개무량하다. 긴장된 마음을 푸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아오키씨는 “20년 만에 당연한 세계에 돌아오게 됐다”며 “딸이 창공의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엄마 잘 됐어요’라고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딸에게 지켜줘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고 했다.

검찰은 28일까지 이번 재심 결정에 대해 대법원에 특별항소를 할지 판단할 방침이다. 검찰이 특별항소를 포기하면 두 사람에 대한 법원의 재심이 시작된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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