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객·논객·문인·철학자들… 반상의 藝 꽃피운 관철동 시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0호 30면

1968년 서울 관철동의 한국기원 기공식에서 최재형 당시 이사장, 배상연 상임이사, 서정귀 이사(왼쪽부터)가 삽으로 흙을 뜨고 있다. [한국기원]

“한국 바둑은 이곳에서 장미꽃을 피워냈다. 1989년 조훈현이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하더니 93년과 94년엔 이 기간에 열린 8개의 세계대회를 모조리 휩쓸었다. 에어컨은 언제나 덜덜거리고, 대국 때면 거리의 번쩍이는 네온과 소음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야 했지만 그래도 이곳 관철동은 바둑꾼의 가슴을 자극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들, 애호가들이 곁에서 승부를 지켜봐주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한국기원 부총재 박치문(67)의 『관철동 시대』(1997)의 일부다. “수많은 문인과 철학자들, 애호가들이 곁에서 승부를 지켜봐주던 시대.” 이 마지막 문장, 이것이 한국 바둑의 본질을 알려주었다. 1968~94년 관철동에 한국기원이 있던 시대가 그랬다.


 

1960년대 말 서울 종로2가 뒷골목에 자리 잡은 한국기원 앞 거리 풍경.

한국기원 1층 다방은 바둑인 사랑방인간은 몸으로 움직이고 먹고사는 존재다. 몸 없이는 인간이 없기에, 인간은 거처할 곳이 있어야 한다. 서울 종로2가 3·1빌딩 뒤에 한국기원이 있었다. 의젓한 5층 건물이었다. 집은 살 사람들에게 알맞아야 한다. 집이 크면 흉가가 된다. 기원 5층엔 좋은 바둑책 출판사의 대명사인 현현각과 시인협회가 자리잡았고 범일진흥과 동양기업 등 기업도 세를 들었다. 하루 연인원 2500여명이 출입했다.


정문도 중요하다. 문으로 외기(外氣)가 들어온다. 따스하고 유동적인 기운이 들어와야 한다. 1층에는 유전(有田)다방이 자리를 잡고 기원 문의 한 축을 담당했다. 3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다방은 문화인들의 살롱이었다. 바둑은 너와 내가 만나 수담을 나누는 놀이. 다방과 잘 들어맞는다. 다방이 잘돼 기원 옆 찻집 시모나, 건너편 반쥴이 유명했다.


문학청년들이 관철동의 디오게네스 민병산(1928~88)을 유전 다방에서 만났다. 민병산은 맘에 드는 청년을 만나면 별 대화도 없이 빛바랜 점퍼 안주머니에서 한지 두루마리를 꺼냈다. 글씨와 그림이 어우러진 A4 크기 한지를 주곤 했다. 92년 문인들은 받아두었던 민병산의 글씨를 모아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애기가들은 유전다방에서 소일하고 여가를 보냈다. 그러곤 2층의 일반회원실, 3층의 찬조회원실, 4층의 기사실로 올라갔다. 바둑은 그렇게 만남과 대화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서울의 심장 종로에 자리 잡은 바둑은 모든 것을 옆에 두었다. 기사실·현현각·시인협회·운당여관·술집·밥집·유전다방·반쥴… 언제나 바로 옆에 있었다. 신문사도 걸어서 10분. 80년대 초 문인들이 만든 한돌기원도 5분 거리 청진동에 있었다.


기원 옆에 신문사, 다방, 술집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터를 고를 때엔 조남철의 경험이 주효했다. 한국기원의 전신인 조선기원의 자리터에 대한 회고를 보자. “기원 창립에 공이 컸던 이학진 씨가 앞장서서 사동궁(寺洞宮) 15간짜리 사랑채를 빌려내 주었다. … 남산동이나 적선동 때보다도 종로 중심가에서 가까워져 찾아주는 팬들을 생각할 때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다. 더욱이 사동궁 안 사랑채였으므로 바둑 두는 손님들도 마치 왕족이나 귀족이 된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격이었다.”


사동궁은 예전 인사동 종로예식장 자리로 의친왕의 사저였다. 의친왕의 사위였던 이학진은 한국기원의 설립은 물론 김인과 조훈현의 성장을 도운 한국 기단의 뿌리였다. 맑은 얼굴에 단아한 태도 갖춘 선각자였다.


기사실은 관전기의 산실집은 권능이 미치는 곳이다. 집과 집 사이, 거리는 성스럽다. 그런 거리를 건너 많은 애기가들이 바둑세계로 들어갔다. 4층 기사실은 검토실을 겸했다. 바둑판 네댓 개에 의자 10여 개. 거리의 소음은 들을 만하고 햇살은 따스하게 남향 창으로 스며들었다. 여직원이 한 명 문가에 앉아 프로들의 비서 역할을 해주었다. 기사들은 5층 현현각과 1층 유전다방, 4층의 편집부를 오갔다. 모이고 헤어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관전기자도 멤버였다. 관전기자는 기사실에서 해설을 듣곤 했다. 조남사·박재삼·김성동·박치문 등 유려한 필치와 세련된 안목을 가진 문인들이 관전기를 담당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만나고 있었다. 문인과 바둑, 신문은 하나가 되었다.


관전기는 신문이 개최하는 기전의 값어치를 높이는 수단이다. 아니 수단이기 이전에 바둑의 본질에 가깝다. 문장력과 함께 바둑의 추이를 살필 실력도 겸해야 했다. 그리고 대국자와 가까워서 현장감도 살릴 수 있어야 했다. 관전기는 대국자의 대립과 인간적 고뇌에도 초점을 맞추었다. 관전기를 통해 애기가들은 바둑의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산실이 기사실이었다.


 

70년대 서울 인사동 운당여관의 대국장 풍경.

대국 품격 높인 인사동 운당여관5분 거리 인사동에 운당여관(雲堂旅館)이 있었다. 89년엔 도심 계획에 따라 헐렸고 이후 경기도 남양주군 국립영화촬영소에 재건되었는데, 그 운당이 바둑의 도전기에서는 빠뜨릴 수 없는 장소였다. 풍치가 있었다. 마당은 소박했고 방은 아늑했다. 대국자는 대국하다가 눈을 정원으로 돌리곤 했다. 지방기사는 하루 전 도착해 휴식을 취했다. 대국실 옆방은 검토실로 잡아두어 기사들과 애기가들이 마냥 죽쳤다.


장소가 장소라 승부의 마무리에도 좋았다. 80년 서봉수가 패해 조훈현이 전관왕이 되었을 때 관객은 승자 옆으로 몰렸다. 박치문과 고(故) 이준학 4단이 서봉수를 붙잡았다. 건너편 관수동 언니집으로 가서 술잔을 비웠고 서봉수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정화작용을 하고 힘이 되어준다. 승부 옆에는 감성을 조정해줄 장소가 있어야 한다. 갖가지 감정을 흘려낼 술집이면 더욱 좋다.


프로에겐 아픔도 있었다. 프로에게 바둑을 배워도 아마추어들은 봉투를 주지 않고 술로 때우고 말았다. 하지만 바둑계 전체를 위해서는 굳이 나쁜 문화만도 아니었다.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가 하나 되는 그것, 동질감과 공감. 바둑도 그런 것에 의해 놀이가 진행되는 것이다. 반상은 일부일 뿐이다.


관철동은 시간과 공간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데 적절한 곳이었다. 공간을 채우는 스토리. 그것은 다양한 하위문화가 함께하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한 판의 바둑엔 감정과 논리가 들어간다. 하지만 대국자와 관객이 공감을 갖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다. 이름이 있어야 자리가 잡힌다. 바둑 두고 술 먹는 일이 다반사라 술과 인생의 담론이 자연스러웠던 관철동 시대엔 이름의 신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기보 1981년 제20기 최고위전 도전 1국. 조훈현의 흑1이 과수로 백2 자리가 대세점이었다.

환락의 물결에 밀려난 신화의 산실60년대에 널리 회자되었던 “조남철이가 와도 못 이겨”란 말은 곧 바둑 정체성의 자각이었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청산(靑山) 김인은 다른 문화였다. 김인이 청산이기에 애기가는 구름이 되었고 바둑의 객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말까지 15년에 걸친 조·서 대결은 영웅신화였다. 70~80년대 근대화 과정 속 경쟁을 통한 극복을 제시했다. 라이벌인 조훈현과 서봉수의 대국에는 과수(過手)도 적잖이 등장했다. 기보를 보자. 조훈현이 둔 흑1이 실수로 당연히 백2 자리가 대세점이었다.


별명은 사람과 세상을 조명하는 놀이. 기사들의 별명도 만들어졌다. 감각적인 독설과 예리한 기풍으로 유명했던 정창현은 면도날로, 김희중은 기왕전의 사나이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기인(奇人) 열전에 들어갈 만해 폭넓은 공감대를 이끌 수 있었다.


반상만으로는 바둑의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나 기사나 사건이 하나의 이름으로 제시된다면 의식의 창조 작업은 보다 쉽게 이뤄진다. 바둑의 저변이 활성화될 때 기사들의 신화가 널리 만들어졌던 것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이고도 신화적인 이야기가 바둑의 확산을 가져왔다.


돌아보면 그 시대는 90년대 초반을 넘지 않는다. 86년엔 연구생 제도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등 예(藝)보다는 기(技)가 전면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철동에 종로코아 건물이 세워진 80년대 중반, 주변은 대학생들의 거리로 변해갔다. 도토루와 같은 가벼운 커피숍이 유전다방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주변을 에워쌌다. 넓은 유리창에 거리를 면한 커피숍은 20대의 취향에 잘 어울렸다. 생맥주 집이 일어섰다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다. 오랜 중국집 중원장이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주변은 환락가로 변해갔다.


기사의 수도 많이 늘어나 대회장이 좁아진 한국기원은 94년 홍익동 이전을 결정했다. 95년 홍익동 한국기원 1층에 바둑TV 스튜디오가 자리를 잡았고 도전기의 무대도 변화를 맞았다. 한실(韓室)의 그윽한 풍치를 메마른 조명등이 대신했다. 공간이 메말라졌다. 그러자 심층적인 생동감이 사라져 관전기도 쓸 게 없어졌다는 푸념이 많아졌다.


풍성한 스토리 위해 관철동 활용했어야홍익동엘 가더라도 관철동은 활용해야 했다. 90년대 한국기원은 공간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했다. 동네의 기운마저도 홍익동은 삭막하다. 술집도 없고 다방도 없다. 그래서인가. 2000년대 초반 바둑은 정체성의 격변을 시도했다. 기예에서 스포츠로 전향하고자 했고 이제 바둑은 스포츠로 자신을 옷 입히고 있다. 장소가 주는 힘을 이겨내지 못해 정체성의 변화를 시도한 거 아닌가 싶다.


바둑이 승부로만 이뤄진다면 관철동은 필요가 없었다. 바둑에는 이야기가 핵심이다. 이야기를 통해 공감이 커지면 누구나 이야기를 통해 자기의 확장을 경험한다. 그것이 문화의 힘. 바둑은 그런 힘을 다른 세계와 함께 어울리면서 얻어냈다.


신(神)은 어디에 거(居)하는가. 신전에 거한다. 인간은 어디에 머무는가. 집에 머문다. 바둑은 어디에 있는가. 68~94년엔 관철동에 있었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