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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이란 “외교는 돈”… 부친 힘 빌려 유럽 사교계 평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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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호 33면

구웨이쥔(오른쪽)은 장제스의 처남 쑹쯔원(가운데)과 친했다. 1943년 가을, 런던. [사진 김명호]

황중한(黃仲涵·황중함)의 부(富)는 상상을 초월했다. 세계에 널려 있는 화교 사업가 중에서 첫 손가락을 꼽고도 남을 정도였다. 재산 축적 과정에서 현지 관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공직자들을 사람 취급하지는 않았다. “도둑놈 아닌 놈이 단 한 명도 없다.” 외교관에게는 더 심했다. “입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첫 부인 웨이(魏)씨가 딸 후이란(蕙蘭·혜란)을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탐정을 고용했다. “베이징·상하이·런던·파리·워싱턴·뉴욕 등 구웨이쥔이 머물던 곳을 뒤져라. 여자관계를 철저히 조사해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다. “최근에 세상 떠난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의 딸은 두 번째 부인입니다. 이혼한 첫 번째 부인이 상하이에 있습니다.” 남편의 편지를 받은 웨이씨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도 익히 알고 있다.”


황중한이 구웨이쥔을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너무 가난하고, 돈이 없다. 이런 사람이 공직에 있다 보면 사고치기 쉽다. 이혼한 부인이 아직 혼자 산다. 탕샤오이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엉뚱한 재주를 부렸을지 모른다. 거짓말을 잘해야 유능한 외교관이다. 구웨이쥔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웨이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유도 그럴듯했다. “구웨이쥔은 보통 외교관이 아니다. 국제사회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는 용(龍)띠고 남편은 호랑이(虎)띠다. 용호상박, 말이 부부지 서로 양보한 적이 없고, 얼굴만 봤다 하면 싸우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웨이쥔과 후이란은 돼지(猪)와 호랑이, 백발이 될 때까지 해로할, 최고의 궁합이다.” 황중한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놨다. 웨이씨는 “오건 말건 맘대로 하라”며 신경도 안 썼다.


황후이란은 외교관 부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영어와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적응력도 뛰어났다. 권력의 속성과 복잡한 국제정치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30년 여름, 모나코 몬테카를로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는 황후이란(오른쪽 첫 번째). 오른쪽?두 번째가 20여년 후 구웨이쥔의 넷째 부인이 되는 옌요우윈(嚴幼?). [사진 김명호]

황중한은 별난 사람이었다. 사위는 꼴 보기 싫어했지만, 딸에게는 거금을 쏟아 부었다. 당시 서구의 대사들은 부호들이 많았다. 중국은 정반대였다. 십중팔구, 주머니가 넉넉하지 못했다. 부인들도 친정이 그저 그랬다. 정부의 지원도 미약했다. 매달 나오는 600달러 외에 파티 비용이 따로 나왔지만, 몇 푼 안됐다.


구웨이쥔은 예외였다. 황후이란의 담담한 회고를 소개한다.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줬다. 외교는 돈이다. 이왕 외교관과 결혼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달마다 큰 돈을 보내줬다. 그 덕에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나는 온몸에 보석을 휘감고,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 입었다. 남편의 예복도 영국에 직접 주문했다. 엄마가 결혼 선물로 사준 롤스로이스를 다들 부러워했다. 중국 부인들이 진입하기 힘들다는, 서구 귀부인들의 사교 모임도 별게 아니었다.”


황후이란은 하루가 멀게 크고 작은 파티를 열었다. 호화로움에 참석자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구웨이쥔이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나는 내 능력껏 네게 장신구를 사줬다. 파티에 참석한 부인들이 너를 부러워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이러다 보면 다들 나를 의심한다. 앞으로는 내가 사준 것들만 착용해라.”


황후이란은 자신의 방법을 고집했다. “결혼 전에는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없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비로소 알았다. 풍족하지 못하면 저들이 우리를 무시한다. 다른 나라 외교관 부인들의 콧대를 꺾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다.”


파리의 중국대사관은 볼품이 없었다. 구웨이쥔이 대사 발령을 받자 황후이란은 “사비로 대사관을 짓겠다”며 부지를 물색했다. 중국 정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건축 비용은 물론이고, 내부시설도 황후이란이 부담했다. 구웨이쥔은 “사비를 들였지만 완성되면 국가 소유가 된다. 대사를 그만둘 때 우리가 구입한 고가의 가구나 장식물도 들고 나갈 수 없다”고 말렸다. 황후이란은 “알고 있다”며 끄떡도 안했다. 비슷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훗날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도 황후이란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수많은 대사 부인 중 황후이란과 견줄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황후이란의 공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결혼 2년 후인 1922년 여름, 중국정부는 구웨이쥔을 외교총장(외교부 장관)에 임명했다. 남편 따라 귀국한 황후이란은 싱가포르에서 열일곱 번째 부인과 노년을 보내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국의 외교를 관장하는 사람이 관저가 없다. 베이징의 테스쯔(鐵獅子)후퉁(胡同·골목)에 유서 깊은 저택이 있다. 명나라 말기,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던 우싼구이(吳三桂·오삼계)의 애첩 천위안위안(陳圓圓·진원원)이 살던, 사연 많은 집이다. 방도 200개 정도 된다. 이 정도면 총장 관저로 적합하다. 구입하고 싶다.”


황중한은 한술 더 떴다. “집만 구입해서 뭐하냐. 내부를 현대식으로 바꾸고, 난방과 위생시설도 서구식으로 개조해라.” 수리가 끝나기도 전에 구웨이쥔이 총장직에서 물러 날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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