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필하모닉홀. 제17회 쇼팽 국제 콩쿠르 입상자가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10명의 결선 진출자 옆에는 대부분 부모와 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받았던 우승자 조성진(21)씨는 혼자 서 있었다. 감격하는 부모의 모습은 생중계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회사원, 어머니는 주부
뒤에서 조용히 뒷받침하는 역할
금호영재 출신, 실력파 선생님 만나
유튜브 통해 최고 연주 자주 접해
피아니스트 손열음·김선욱·문지영
비음악가 집안서 스타 탄생 늘어
조씨의 어머니는 같은 장소에 있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사진에 찍힐까 걱정해 멀찌감치 떨어졌다. 조씨의 아버지는 “1차부터 결선, 수상자 발표까지 성진 엄마는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연주는 성진이가 하는 거고, 부모는 앞에 나서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익명을 요청했고 기사화도 원하지 않았다. “성진이가 어렸을 때부터 한 결심”이라는 말만 전했다. 아이가 스스로 음악을 하고 부모는 돕기만 하겠다는 뜻이다. 조씨의 아버지는 대기업 건설사 직원이고 어머니는 주부다. 둘은 ‘그림자 부모’로 유명하다. 조씨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신수정씨는 “아이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성장해 나가면 뒷받침만 조용히 하는 부모”라고 소개했다.
지난 시대 한국을 빛낸 음악가 뒤에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부모가 있었다. 또 부모의 음악적 유전자를 물려받아 재능을 빛내는 연주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공식이 바뀌고 있다.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조성진씨가 대표적이다. 조씨의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도울 뿐 나서지는 않는다.
고(故) 이원숙 여사는 헌신적 어머니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정명화(71)·경화(67)·명훈(62)의 ‘정 트리오’를 키워냈다. 서울에서 잘되던 음식점을 접고 아이들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해 한식집을 하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딸이 연주할 홀의 객석 의자 하나하나를 직접 고치는 일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음악 유전자를 물려받는 것도 하나의 공식이었다. 첼리스트 장한나(33)의 어머니는 작곡을 공부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35)은 아버지가 바이올리니스트다.
이제 ‘클래식 신인류’는 비교적 부모들과 독립적으로 성장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29)씨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혼자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모스크바에 갔다. 청소년 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손씨는 “고등학교 선생님인 어머니가 내 뒷바라지를 위해 모든 일정을 포기할 순 없었다”고 기억했다. 2006년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스타로 떠오른 김선욱(27)씨는 직접 차를 몰고 공연장에 도착해 연주를 한다. 그의 부모 또한 음악가가 아니고,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지난달 부조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문지영(20)씨의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음악 영재의 탄생 공식이 바뀐 것은 상당 부분 시스템 덕이다. 우선 영재 발굴 제도가 자리 잡았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1998년부터 14세 이하의 재능 있는 연주자를 뽑아 연주 기회를 주고 있다. 지금껏 배출한 영재가 1000여 명이다. 조성진·손열음·김선욱·문지영씨 역시 금호 영재 출신이다. 문지영씨는 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 지원했다가 김대진 교수에게 발탁됐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실력 있는 선생님과 연결되는 루트가 일반화했다. 조성진씨 또한 피아니스트 신수정씨와 만난 후 국제 콩쿠르 입상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연주자 한 명을 집중 지원하는 기업도 눈에 띈다. 조성진씨는 제조업체 자강산업에서 매해 2000만원을 후원받는다.
해외 음악계와 접속이 원활해진 점도 부모의 부담을 줄였다.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2011년 일본 도쿄에서 조성진씨의 연주를 들었다. 게르기예프는 세계 음악계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인물. 조씨의 실력을 보고 후원자를 자처했다. 연주자 부모의 변화는 시대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김용배 전 예술의전당 사장은 “조성진 세대 음악가들은 유튜브에서만 100가지 연주를 찾아 들을 수 있다. 어린 연주자라도 스스로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덕”이라고 말했다.
김호정 기자, 류태형 객원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