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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이 한국에서 만들어진다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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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까칠한 발견]
‘인턴’이 한국에서 만들어진다면

''영화는 극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한국영화의 재미를 앗아가는 촌스러운 구태다. ''

신파란 무엇일까?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19세기 말, 눈물을 자아내는 공연물을 신파극이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된 용어다. 너무 울리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우연을 남발할 때, 그래서 어찌됐든 울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서사를 가리켜 우리는 신파라고 비판한다. 카타르시스가 깊은 연민과 공감을 통해 심지어 공포까지 느끼는 상당한 정신 작용의 결과라면, 신파는 동공에 고춧가루를 뿌려 얻어내는 눈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양파를 써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최근 뒤늦은 흥행 기록을 써나가는 ‘인턴’(9월 24일 개봉, 낸시 마이어스 감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신파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영화였다면 어땠을까. 대개 노인이 주인공이면 한국영화의 접근법은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추창민 감독)와 같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슬픔의 드라마다. 이때 노년은 슬픔과 가난, 육체적 쇠락의 상징적 압축물이 된다. 다른 하나는 ‘국제시장’(2014, 윤제균 감독) 류의 계몽적 존경의 드라마다. 노인들에게도 한때의 젊음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노고에 마땅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는 식의 훈계가 암시돼 있게 마련이다.

만약 한국적 드라마였다면 ‘인턴’의 줄거리는 기승은 코미디, 전결은 신파적 휴먼 비극이 됐을 것이다. 가령 벤(로버트 드니로)이 사실은 말기암 환자임이 드러난다거나, 치매에 걸렸음을 알게 되어 젊은 여 사장 줄스(앤 해서웨이)가 눈물을 쏟는 식 말이다. 아니면 이런 결말도 가능할 것이다. 줄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전문 경영인 자리에 벤을 앉히는 거다. ‘당신의 세월을 사겠다’는 식의 오글거리는 대사도 곁들여졌을 법하다.

이는 곧 한국 드라마 장르 영화가 지나치게 ‘극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영화는 잔잔한 일상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엄밀히 말해 불안해 한다. 누군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싸우거나 화해하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마치 원재료로 맛을 내야 마땅한 최고급 생선 요리에 자꾸만 조미료와 향신료를 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쯤에서는 웃겨야 하고, 이쯤에서는 울려야 한다는 컨베이어 벨트 식의 서사 구성에 대한 강박도 한 몫 거든다. 그러니 영화는 반드시 희극 아니면 비극으로 끝나야 한다. 즉, 주인공인 두 사람이 영화의 시작점보다 훨씬 더 훌륭한 상태로 성장하거나, 훨씬 더 나쁜 상태로 파국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세련됨은 일상을 일상답게 그려내는 여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인턴’에서 줄스의 일상에 대한 묘사를 보자. 비슷한 컨셉트의 한국영화 ‘워킹걸’(1월 7일 개봉, 정범식 감독)과 비교해 봐도 좋다. 일하는 여자의 정신 없이 바쁜 하루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바쁜 여자를 마치 글로 배운 듯, 상투적으로 그린다. 아이와 정서적 교류를 할 시간이 없고, 꼭 비속어를 섞어 쓰는 친정 엄마가 등장해 뭔가 웃음을 줘야만 한다. 사실 한국영화 속에 등장하는, 특히 코미디영화에 등장하는 워킹맘은 없다.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워킹맘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 환상적인 것은 도우미 아주머니다. 요즘 한국인 아주머니를 구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친구 같은 도우미는 결코 없다.

‘인턴’에서 줄스의 아침은 정말 여느 젊은 CEO의 아침이라 해도 될 만큼 무난하고 평범하다. 실버 세대인 인턴 벤의 아침도 마찬가지다. 사실적이지만 다정하고 정직하다. 이 영화는 노년에 대해 계몽하거나 워킹맘의 손을 들어주는 작품이 아니다. 다만 두 극단적 캐릭터를 통해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영화는 극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재미를 앗아가는 촌스러운 구태일지도 모른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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