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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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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24면

[영화 속에서] ?사랑마저 버겁던 회색빛 시대?청춘의 휴일은 죽은 시간일 뿐

이만희 감독의 ‘휴일’은 휴일마다 만나는 허욱과 지연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다. 그러나 이들의 시간은 즐거운 휴일이 아니라 공허한 휴일이며, 설렘으로 휴일을 기다리는 연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휴일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휴일’은 1968년 제작되었는데, 내용이 불온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당시 개봉하지 못하고, 남겨진 필름의 복원 과정을 거쳐 2005년에 대중에 공개되었다. 우연히 획득한 이 시차는 한국사회가 여전히 불안한 ‘휴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1 허욱(오른쪽)과 그의 연인 지연.

일자리도 돈도 없는 60년대 룸펜의 전형허욱은 일자리도 돈도 없는 인물이다. 지연과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줄담배를 피워대는 60년대 룸펜의 전형이다. 어느 휴일, 남산에서 데이트를 하던 지연은 임신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낙태 수술을 결정해도 수중에는 돈이 없다.


영화의 전반부는 허욱이 돈을 구하기 위해 친구들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첫 번째 친구는 연락이 닿지 않는데, 카메라는 벨이 울리는 전화기와 친구로 추정되는 인물이 소파 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습을 비춰준다. 두 번째 친구는 극장에서 만난 여자와 섹스를 하던 중 허욱을 맞이한다. 허욱의 이야기를 들은 후 친구는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있느냐며 그를 비웃는다. 세 번째 친구는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술로 세월을 탕진하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친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여섯 번째 목욕을 하는 중이다. 허욱은 그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기 전 돈을 훔쳐 달아난다.


돈을 구하기 위해 친구를 만나는 과정은 우화적인 표현법을 떠올리게 한다. 대표적인 예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에피소드다. 자신의 별을 떠난 왕자는 다른 행성을 방문하며 저마다 약점을 지니고 있는 사업가, 술꾼, 허영심 많은 남자, 왕, 점등원 등을 만난다. 왕자는 이들의 말과 행동에서 어른들의 이상한 태도를 경험한다.


‘휴일’의 방문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기성세대를 풍자했던 ‘어린 왕자’와는 달리 허욱의 친구들은 주인공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허욱은 평소 연락이 잘 안 되고, 술에 취해 있는 날이 많으며, 여성편력이 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주머니 사정에도 다방 커피와 담배를 포기할 수 없는 허영기 넘치는 인물이다. 허욱이 친구들을 찾아다니는 장면은 이 작품이 1960년대의 청춘 군상을 보여주는 우화임을 대변한다.

2 지연이 수술에 들어간 사이 허욱은 밤거리를 배회하다 한 여자를 만난다.

휴일은 삶을 가두는 박제된 시간영화의 후반부는 지연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동안 허욱이 서울의 밤거리를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허욱은 술집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그녀를 탐하다 새벽 종소리에 놀라 깨어난다. 수술 중인 연인을 방치한 채 향락을 탐닉하는 주인공의 행동은 꽤나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시간이기보다는 모더니즘의 우화들이 지닌 일탈의 시간이자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죽은 시간’에 가깝다. 술집에서 만난 여성도 지독히 외롭고 우울한 인간 군상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전망도 미래의 시간도 차단된 타락과 폐허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후렴구처럼 등장하는 “일요일에 만난 사람들은…”은 1960년대라는 삶의 공허함을 대변한다. 휴일은 노동하는 시간과 대비될 때 의미가 생긴다. 그러나 허욱에게는 365일이 휴일이다. 어제도 휴일이었고, 내일도 휴일인 오늘의 휴일은, 더 이상 휴일이 될 수가 없다. 사랑도, 임신도, 출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휴일의 수렁에 빠진 허욱의 상태는 전차틀 타고 종점에 이른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닮아 있다. 그것은 전차의 선로가 끊어진 상태, 즉 더 이상 길이 없는 막다른 아포리아의 상태다.

3 지연의 죽음을 전해들은 허욱은 정신없이 전차를 타고 종점까지 흘러간다. [사진 마티]

영화를 통해 막혀 있는 아포리아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이 상황을 체험하는 허욱이 아니라 ‘휴일’ 그 자체다. 영화 속 휴일은 삶을 가두는 박제된 시간이자 취한 시간이며, 돈을 훔치거나 남을 속이는 시간이다. 이만희의 섬세한 감성은 박제된 시간성을 한 편의 강렬한 영화로 뽑아낸다. 그것은 메말라가는 주인공의 모습처럼 죽음의 향기를 뿜어낸다. 방황조차도 열정적이지 않는, 죽은 시간들이 영화를 촘촘히 채워가는 것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청춘을 아프게하는 우리 시대?‘서글픈 휴일’은 끝나지 않았다

영화 ‘휴일’을 연출한 이만희(1931~ 1975) 감독은 원래 배우였다. 1956년 영 ‘사도세자’에서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안종화 감독의 조감독이 된 그는 ‘주마등’(1961)을 시작으로 ‘다이알 112를 돌려라’(1962)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명감독 반열에 올랐다. 특히 66년 내놓은 ‘만추’는 강렬한 휴머니즘을 다룬 영화로 극찬을 받으며 최근까지 영화 및 연극으로 리메이크 되고 있다. ‘삼포 가는 길’을 편집하던 중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8년은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둘러싼 갈등의 여진이 그대로 남아 외적 상황은 불안했고, 연초에 벌어진 일명 김신조 사건은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에 힘을 보태 주었다. 더군다나 이틀 뒤인 1월 23일 북한은 미국의 푸에블로 호를 납포한다. 이처럼 1968년은 전방위적 위기 국면으로 시작되었다. 내적 갈등은 외적 갈등으로 봉합된다는 정치철학의 공식을 박정희 정권이 지나쳤겠는가.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을 향한 공격은 이적 행위라는 논리로 박정희 정권은 다시 한 번 철권통치를 행사할 준비에 몰입한다.


『구보 씨의 하루』 연상시키는 탁발 과정1968년의 이 위기는 한 영화의 운명에 극적인 영향을 끼친다. 67년이라면 충분히 개봉되었을 이만희 감독의 영화 ‘휴일’은 강화된 검열로 상영이 불가능해졌다. 일사불란한 질서를 관철시키려던 체제로서는 체제로 환원시키기 어려운 잉여 인간들을 다룬 이 영화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빈털터리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두 남녀. 휴일에 만난 남녀는 고뇌에 빠져 있다. 다방이나 식당에 들어갈 돈조차 없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임신 6개월인 여자가 고통스럽게 낙태 얘기를 꺼낸다.


그런데 낙태에도 돈이 든다는 남겨진 냉혹한 현실. 남자는 먼저 구걸을 선택한다. 친구들을 만나서 수술비를 빌리고자 한 것이다. 박태원의 소설 『구보 씨의 하루』를 연상시키는 이 전개는 탁발 행각을 묘사하면서 빛을 발한다. 사무실 소파에서 낮잠에 빠져 통화조차 실패한 친구, 자신의 능력을 받아줄 데가 없다는 울분에 술통에 빠져 지내는 친구, 우연히 만난 여자와 육체적 향락을 즐기는 친구 등. 가까운 친구들 모두가 남자 주인공의 평상시 삶을 보여주는 거울이었고, 너무나 닮았기에 그들 역시 빈털터리였다.


구걸이 어려우니 이제 훔치는 일만 남았다. 학창시절 돼지라고 놀렸던, 그러니까 동창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친구. 그 탐욕스런 친구는 마침 욕조 안에서 여섯 번째의 목욕으로 휴일의 지루함을 달래던 중이었다. 남자는 친구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 옷가지에서 두툼한 지갑을 발견한다. 비집고 나온 지폐 뭉치. 남자는 돈을 훔쳐 급히 그 집을 빠져나온다.


잉여들에겐 한없이 저주스러운 휴일여자가 수술을 받는 동안 남자는 카페에서 술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다가 혼자 있는 낯선 여자를 유혹한다. 한밤중 공사장 한복판에서 격렬한 정사 도중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문득 남자가 정신을 차린다. 정신없이 산부인과로 뛰어가지만 남자는 절규한다. 여자가 수술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슬픔은 아이러니하게 표현된다. “이제 일요일을 기다릴 필요도 없어. 커피값이 없어도 돼.” 남자의 독백은 슬프고 서럽게 우리의 마음에 내려앉는다.


이만희 감독이 섬세하게 포착해낸 지점이 바로 ‘휴일의 아이러니’ 아니었을까. 대도시 노동자에게는 노동일과 휴일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 주어진다. 자본주의의 비밀은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는 자명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진실 속에 있다. 노동자가 재화나 용역을 생산하고, 그 노동자가 소비자로 변신하여 자신이나 동료 노동자가 만든 재화나 용역을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니 노동을 쉬는 기간, 즉 휴일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별다른 직장이 없는 이에게 휴일은 저주의 시간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근사한 식사와 멋진 옷을 사주고 싶지만, 노동시장에서 버려진 이에게는 돈이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평일에는 실업자 또한 맘 편히 대도시를 배회하기 불편하다. 일을 하지 않고 놀고 있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허영 때문이다.


남녀 주인공은 일요일에만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를 사람들에게, 혹은 서로에게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휴일을 기다리지만 휴일이 오는 것을 무서워 했으며, 휴일이 빨리 가기를 원했지만 또 휴일이 가는 걸 아쉬워했다. ‘휴일의 아이러니’라 불릴 만한 서글픈 풍경이다.


‘휴일’ 속 남녀만의 비극이 아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살고 있다. 가파른 증가세에 놓인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률, 임금피크제, 쉬운 해고 등으로 생계가 불안해진 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에게 휴일은 얼마나 저주스럽고 또 얼마나 매혹적인가.


강신주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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