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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 두둑해진 중국 “우리 체제, 서구보다 낫다” 자신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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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6 면

“중국과 서방의 정치체제가 경쟁하는 신(新) 체제 경쟁 시대가 시작됐다. 중국의 ?민주집중제?는 하나의 국제 표준이 될 것이다.”


 중국 주류 정치학계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놓고 미국과 소련이 벌였던 체제 경쟁의 새로운 막을 열겠다는 일성이다.


 이런 주장은 지난 9일 중국 상하이(上海) 푸단(復旦)대에서 ‘국가개혁과 동아시아 발전’을 주제로 열린 한·중 학술대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한국 민간 싱크탱크인 ‘포럼오래’(회장 함승희)와 푸단대가 공동 주최한 이 대회에는 양국의 저명한 학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발제자로 나선 양광빈(楊光斌) 런민(人民)대 정치학과 교수는 “현 시점에서 ‘세계 정치 선수권 대회’가 열린다면 우열의 검증 기준은 정부의 관리 능력이 될 것”이라며 “소련 붕괴 이후 거의 대부분 국가가 서구에서 말하는 ‘좋은 제도’(자유민주주의)를 채택했지만 서구처럼 발전한 곳은 한국을 포함해 몇 나라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1992년 『역사의 종언』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현 세계를 보면 그가 틀렸음을 알 수 있다”며 “20년 후엔 세계의 학자들이 중국 체제를 모델로 하는 책을 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께 참석한 정창중(鄭長忠) 푸단대 정치학과 교수도 “오랫동안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돼 왔지만 대부분 국가가 서구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며 “각국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린샹리(林尙立) 푸단대 부총장은 “이런 중국의 체제 자신감은 사회주의라는 기초 제도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하며 “향후 중국의 발전 방향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난다면 국가적 실패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체제는 선거에 휘둘리지 않아”이번 포럼에 참석한 학자들은 중국의 1급 정치학자이자 공산당 간부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공산당의 공식 견해와 다름없다.


 중국에선 미국의 세계 패권이 확립된 1990년대 이후 서구식 대의 민주주의의 도입 실험이 한동안 진행됐다. 포드재단 같은 국외 단체는 중국 내에서 기층 촌민선거를 조직해 상향식 의사 전달을 시도하기도 했다. 2000년대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는 ‘중국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며 서구적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줄곧 표현해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서구체제에 어느 정도 순응하려 했던 중국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중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지면서부터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이 2000년대 중반 급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방식을 내세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우선 ‘민주’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서구와 선을 그었다. 중국의 대표적 민주주의 이론가인 왕사오광(王紹光) 홍콩중문대 교수는 “민주주의를 다당제와 경쟁선거 여부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며 “정부가 시민의 바람에 응답하는 것이 민주의 핵심이며 여기서 ‘바람’이란 주관적 ‘요구’가 아닌 객관적 ‘필요’”라고 강조한다. 선거로 대표를 뽑을 경우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의 이기적인 요구를 들어줘야만 하고 부자나 엘리트가 정치를 독점하기 쉬운 반면 중국에선 선거에 휘둘리지 않는 당 간부들이 불편부당하게 국민의 객관적 필요를 잘 가려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2년 집권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중국은 이론과 나아갈 길, 정책에 자신을 가져야 한다(理論自信, 道路自信, 政策自信)’며 중국식 모델이 새로운 ‘보편적 기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강한 공산당과 현명한 리더에만 의지”중국이 이처럼 체제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배경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서구 선진국이 정책 실패의 수렁에 빠지자 ‘자유민주체제가 우월하다’는 신화가 깨졌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은 현재 남북전쟁 이후 가장 심화된 양당 분열을 겪고 있고 대통령제에 대한 신뢰도는 건국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8년 79.9%에서 지난해 111.1%로 불어났다. 올해 각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에델만 정부신뢰지수(ETB)에선 거의 모든 발전국가의 정부 신뢰도가 50%를 밑돌았다. 반면 중국은 이 조사에서 82%를 기록했다. 적어도 국민의 만족도는 높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중국식 모델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는 “중국이 대의제의 대항 모델로 내놓은 소위 ‘민주집중제’는 아래의 목소리가 민주적으로 위로 전달되고(민주), 위에서 결정하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집중)는 것인데 실제론 상부의 관리체제가 하부 목소리가 올라오는 걸 억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동수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는 “중국이 민주의 원칙이라고 내세우는 ‘위민(爲民·for the people)’의 개념도 민주주의의 초보 단계로, 국민이 정치에 참여(by the people)하는 단계까지 넘어가야 성숙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윤미 성균중국연구소 협동연구원은 “토머스 프리드먼(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 ‘일당 독재가 단점이 있지만 중국처럼 똑똑한 집단이 통치하면 엄청난 장점을 지닐 수 있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결국 시스템이 아니라 ‘강한’ 공산당과 ‘현명한’ 지도자에만 의지해야 하는 것이 중국식 체제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통치가 과연 성공적이었나에 대해서도 반론이 잇따른다. 장윤미 연구원은 “후진타오(胡錦濤) 시대 중앙정부가 내세운 빈부 양극화와 환경문제 해결을 지방정부가 무시하는 바람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잃어버린 10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경제성장 이면에 감추어진 불안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 6~7월 상하이 증시 폭락과, 시장주의자라던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모든 관치(官治) 수단을 동원해 사태를 봉합한 대응 방식 역시 금융정책에 대한 미숙함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월 톈진항 폭발사고는 안전불감증과 부정부패, 언론 통제 등 중국 정치체제의 모순이 한데 어우러진 ‘종합선물세트’로 꼽힌다. 서방의 중국 문제 권위자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샴보 워싱턴대 교수는 지난 3월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 “중국이 최근 서방의 보편적 가치관을 배격하기 위해 정치적 압제를 강화하고 있다”며 “중국 당국의 자신감이 반영된 조치지만 이런 압제로 인해 중국은 이제 붕괴를 향한 하강 국면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공산당 정당성 도전받자 체제 경쟁 선언”이남주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점점 늘어나는 국내의 각종 시위와 인권문제로 인해 공산당 통치 정당성이 도전받자, 이에 대응하면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서구와 체제 경쟁을 선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지적처럼 활기를 잃어가는 서구의 각국 정부엔 어떤 처방이 필요할까. 정해진 답은 없다. 영국 언론인 존 미클레스웨이트와 에이드리언 울드리지는 저서 『제4의 혁명』에서 “제3 혁명의 성과인 20세기 복지국가식 모델의 유효기간이 다 됐다”고 진단하며 “제4의 혁명을 주도할 창조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부가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여전히 장점이 많은 모델”이라고 밝혔다.


 김병준 교수는 “대량화되고 복잡해진 사회문제를 의회·행정부가 모두 해결할 순 없다”며 “시민 참여를 유도해 그들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고 전문성이 요구되는 분야는 중립적 위원회를 활성화시켜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상하이=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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