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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옷, 좋은 사람, 좋은 인연 나는 행복한 디자이너입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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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14면

1965년 여성복 ‘프랑소와즈’를 시작했으니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산지 올해로 꼭 50년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유니폼을 디자인했고, 그 이듬해 한국의 1세대 디자이너들과 함께 서울패션협회(S.F.A.)를 창단해 5년간 초대회장을 지냈다. 93년부터는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 참가해 세계인에게 한국 패션을 알렸다. 99년에는 영국의 예술전문 출판사 파이돈이 선정하는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82세의 현역 디자이너 진태옥이 걸어온 세월의 흔적들이다.


16일부터 21일까지 서울 동대문 DDP에서 열리는 2015 서울패션위크는 진태옥의 패션 히스토리 5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시작된다. 11월 6일까지 DDP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는 ‘ANTHOLOGY: Jinteok, Creation of 50 Years(이하 앤솔로지)’ 전시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었지만 그래서 난 참 행복한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연륜의 디자이너를 만났다.

진태옥에게 ‘화이트 셔츠’는 디자인의 시작점이자 평생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투명한 첫사랑이다.

디자인의 시작 : 첫사랑 같은 화이트 셔츠 가브리엘 샤넬에게 트위드 재킷이 있고,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에게 랩 원피스가 있다면 진태옥에겐 화이트 셔츠가 있다. “내 디자인의 세포이자 시작점이죠.”


함경남도 원산 출신인 진태옥은 16살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돌 금반지를 전대에 묶고 온 가족이 제주도로 피난을 왔다. 삼성혈 근처 천막 고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이다.


“지금도 제주도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렵지만 그땐 더 했어요. ‘금반지를 줄 테니 운동화 하나를 주고 나머지는 돈으로 거슬러 달라’는 말이 안 통해 결국 운동화 사는 걸 포기할 정도였죠.”


온 가족이 묵던 토담집 벽에는 창호지를 바른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방과 후 돌아와 무심히 창문을 올려다본 어느 날 오빠의 화이트 셔츠(우리가 와이셔츠라고 부르는)가 걸려 있었다. “창호지로 스며든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셔츠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손으로 잡으면 바스락 소리가 날 만큼 투명했던 그때의 풍경이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아요.”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날렵한 선, 세상의 모든 빛을 다 빨아들일 것 같은 하얀 무명천을 사랑하게 된 건 그때부터라고 했다. ‘화이트 셔츠를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의상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첫사랑을 못 잊는 여자처럼 진태옥의 무대엔 언제나 화이트 셔츠가 있다.


“여성복에서 화이트 셔츠는 블라우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죠. 중성적인 섹시함이 드러나거든요. 어느 해에는 셔츠의 목선을 뒤로 많이 젖혀지도록 디자인했죠. 작고 오톨도톨한 목 뼈 선과 어깨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한 건데 여자가 봐도 너무 아름답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어느 해에는 앞 선 단추가 가슴 아래쪽부터 시작하도록 만들었어요. 길게 파진 앞선 사이로 가슴골이 살짝 보일락 말락 하게 말이죠. 때로는 소매를 길게, 품을 넉넉하게, 때로는 장식을 많이 넣었다 뺐다가. 지금도 화이트 셔츠 디자인은 내게 여러 가지 상상력을 줍니다.”

광목 한 장은 한없이 가볍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태산의 무게를 갖게 된다. 디자이너와 ‘대한민국 1세대 디자이너’라는 수식어의 무게 차이 또한 같다.

디자인의 종착 : 일상에서 찾은 블랙 앤 화이트 진태옥이 화이트 셔츠만큼이나 평생을 집착해 온 주제가 바로 블랙 앤 화이트다. 한국의 전통 자수를 응용해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재킷에 옮겨보고, 때로는 피처럼 붉은빛의 드레스를 만들기도 했지만 여전히 무대 한쪽은 검정과 흰색의 옷을 채워뒀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작업복과 일상복 역시 블랙 앤 화이트의 변주다.


“10년 전쯤인가요. 어느 날 출근길에 거울을 보는데 내가 입고 있는 까만 바지, 흰색 셔츠가 문득 감동적으로 보이더군요. 아, 이 ‘블랙 앤 화이트’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십 년이 걸린 거구나. 그렇게 많은 컬러들을 가졌다 버렸다를 반복하더니 결국 종착역은 여기구나 싶었죠.”


‘앤솔로지(選集)’전 개막에 맞춰 준비한 200쪽 분량의 패션 북『JINTEOK: ANTHOLOGY』도 역시나 주테마는 흰색과 검정 옷이다. 세계적인 패션칼럼니스트 수지 멘키스가 쓴 책의 서문도 ‘진태옥만의 화이트’에 대한 찬사로 시작된다.


“…사실 흰색은 하나의 색으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 단지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중립적 색조로 인식됐을 뿐.……그러나 진태옥의 접근법은 다르다. 그녀의 패션에서 흰색은 전면에 자리한다. 스르륵 흐르는 듯한 새틴, 사각거리는 메시, 깃털처럼 가벼운 시폰, 촘촘한 레이스, 그리고 부드러운 실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소재를 이용한 진태옥의 비전은 흰색을 온전히 하나의 색으로 다루는 것이다.……진태옥의 옷은 시와 같다. 때론 속삭이는 듯하며 때로는 강렬한 외침 같다. 그러나 늘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더 많이!’를 외치는 문화에서 진태옥은 우리에게 무려 반세기 동안 특별한 가치를 전해줬다. 그것은 고요한 속삭임이다…”


93년 진태옥이 파리에 처음 진출했을 당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의 기자였던 수지 멘키스는 동양에서 온 패션 디자이너에게 신문 한 페이지를 온전히 할애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멀리서 찾아오는 반가운 ‘벗’으로 지내고 있다.

테마 QUIET : 도트 무늬가 들어간 A라인 코트. 밤 공기처럼 하늘거리는 레이스와 별처럼 점점이 뜬 도트 무늬가 고요하면서도 우아한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테마 GIRL : 소녀에게 어울릴 법한 화이트 셔츠. 진태옥이 사랑하는 두 단어 ‘소녀’와 ‘화이트 셔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테마 BLOOD : 피처럼 붉은 비단에 화려한 전통 자수를 수놓은 옷. 활옷의 전통과 데님의 현대를 조합해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테마 EARTH : 패션 북 『JINTEOK: ANTHOLOGY』의 표지. 진태옥 디자인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블랙 앤 화이트’가 의상과 배경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디자인의 과정 : 옷으로 시를 짓다 ‘앤솔로지’ 특별전은 진태옥의 아카이브에서 80여 벌을 발췌해 10개의 테마와 이에 맞는 공간으로 꾸몄다. 10개의 테마는 Earth·Night·Blood·Star·Dawn·Air·Quiet·Girl·Dew·Breeze로 진 디자이너가 영감을 얻는 자연과 일상에서 선정했다. 패션 북 역시 같은 테마로 구성됐다. 전시와 패션 북 모두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파리 루브르 박물관 국립장식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한국 공예전’을 큐레이팅한 서영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맡았다.


“다른 사람보다 6개월을 앞서 사는 디자이너이다 보니 늘 일에 쫓겨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어요. 정구호 서울패션위크 총감독이 50주년 기념 전시를 부탁하길래 ‘한 번 해보자’ 해놓고는 바로 후회했죠. 2년 전부터 기획한 파리 ‘한국 공예전’ 전시와 일정이 너무 붙어 있다는 걸 늦게 깨달은 거죠. 그래도 어차피 내가 갖고 있는(그는 수백 평의 창고에 자신이 만든 컬렉션 옷을 모두 보관하고 있다) 옷 중에 몇 벌 골라서 보여주면 되겠지 했는데 이게 또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단지 ‘옷’을 보여주는데 그친다면 이번 전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했다.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해서도 패션을 ‘설치예술’로 한 단계 끌어올린 전시여야 했다. 다행히 서영희를 비롯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이들이 돕고 나섰다.


“만들어진 연도가 다 다른 옷을 10가지 테마로 추스르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이렇게 또 새로운 경험을 하는구나 즐겁기도 했어요. 관람객들이 ‘50점밖에 안 된다’하면 겸손하게 받아들여야겠죠. 그래야 ‘앞으로는 60~70점을 받아야지’ 하는 목표가 생기니까요.”


공간 하나를 꾸미기 위해 광목 2000마가 들었다. 타블로이드만 한 크기로 잘라 책처럼 묶는 작업만 수십 시간. 하지만 80대의 노 디자이너는 여전히 노력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자신의 일에 감사하며 전시 제목처럼 ‘옷으로 시를 짓는’ 새로운 도전을 즐겼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 디자인과의 행복한 동거 “난 참 이기적으로 살았어요. 좋은 것만 보고 경험했으니까요. 지금도 폭력영화는 절대 안 봐요. 자연에서 늘 영감을 얻지만 기괴하게 구부러지거나 삭막한 풍경은 피하죠. 그랜드 캐니언의 광활한 풍경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건 개울가의 작은 돌멩이들이에요.”


집도 철저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꾸몄다고 했다. ‘시멘트로 지은 네모박스’라고 표현하는 집 거실에는 5m 높이의 통창을 내고 창호지를 바른 한국식 창틀을 붙였다. 거실 실내엔 2m짜리 탯돌과 방석뿐이다. 친구들은 “점집 같다” 하고 손주들은 “소파?TV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투정하지만 ‘이기적인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나이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죠. 무엇보다 내 주변엔 여러 가지 인연으로 만난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난 그게 참 자랑스럽고 행복해요.”


‘앤솔로지’ 전시와 패션 북을 만들면서도 좋은 인연을 다시 확인했다. 옛날 옷을 요즘 젊은 친구들의 감각에 맞추기 위해 한 번도 작업해보지 않은 젊은 사진작가들과 새로운 연도 맺었다. 인터뷰 당일에는 디자이너 선배인 노라노 선생에게 전시 초대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꼭 오셔서 저 잘했다고 등 좀 두들겨 주세요”라고. 기저귀를 찬 채 어머니 손을 잡고 프랑소아즈 아동복을 사러 왔을 때부터 알고 지낸 배우 배두나에게도 초대 전화를 했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대선배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처럼, 나도 후배들에게 작은 씨앗을 던져주고 싶어요. 개인적으론 부족한 부분이 많은 내가 지금 이렇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다 주변에서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거든요.”


80대 디자이너는 또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줄 ‘2016 SS 서울패션위크’ 개막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JINTEOK: ANTHOLOGY』(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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