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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이란 결혼에 처칠 “퍼스트레이디 탄생 축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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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29면

구웨이쥔은 50여년 간 1급지 대사와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국무총리도 세 차례 맡았다. 이런 기록은 영국의 처칠 외에는 없다. 1946년 7월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한 구웨이쥔과 처칠(앞줄 왼쪽 두 번째와 세 번째).

외교부장 부인 시절의 황후이란. 1922년 8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황중한(黃仲涵·황중함)의 조강지처 웨이(魏·위)씨는 첫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을 애지중지했다. 세 번째 생일날 80캐럿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걸어줄 정도였다. 황중한도 딸이 원하는 건 뭐든지 사줬다. 사설 동물원에 딸이 좋아하는 곰·사슴·공작·원숭이가 그득했다.


황중한은 학교 교육을 경멸했다. 교사들을 초빙해 딸 교육을 맡겼다. 그 덕에 황후이란은 어릴 때부터 네델란드어와 말레이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좋은 선생에게 붓글씨를 익히고, 음악과 미술도 배웠다. 프랑스어와 영어도 막힘이 없었다. 승마는 아버지에게 직접 사사했다.


웨이씨는 남편이 열여덟 번째 부인을 들여놓자 자바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딸에게도 동행을 권했다. “네 아빠는 영락없는 중국사람이다. 중국문화는 사람의 지혜와 발전을 속박한다. 나는 유럽으로 갈 작정이다. 너도 열여덟에 접어들었다. 함께 가서 새로운 자양분을 섭취하자.” 황중한은 말리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 원 없이 다녀라. 돈은 얼마든지 보내 주겠다.”


런던에 자리잡은 웨이씨는 딸에게 운전과 사교춤을 가르쳤다. 황후이란은 춤에 소질이 있었다. 롤스로이스 타고 승마장에 나타날 때마다 귀족집안 자제들의 눈길을 끌었다. 웨이씨는 프랑스를 자주 출입했다. 파리에 친정 여동생이 있었다.


1918년 11월, 유럽 전선에 포성이 그쳤다. 이듬해 1월, 1차 세계대전의 뒷처리를 위한 회의가 파리에서 열렸다. 중국 대표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은 회의 끝 무렵 두 번째 부인을 잃었다. 홀아비 되기가 무섭게 “교통부장 차오루린(曺汝霖·조여림)의 딸과 재혼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차오루린이 친일파로 몰려 곤욕을 치를 때였다.


구웨이쥔은 소문을 무시했다. 대신 신부감 물색을 서둘렀다. 하루는 친구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피아노 위에 걸쳐 놓은 젊은 여자의 사진에 눈이 갔다. 친구는 “집사람 언니의 딸”이라며 불필요한 말도 한 마디 했다. “실물이 사진보다 예쁘다. 지금 이태리 여행 중이다. 파리에 오면 만나봐라.” 구웨이쥔은 물고 늘어졌다. 이것저것 캐물었다. 친구의 부인은 눈치가 빨랐다. 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웨이쥔이 후이란에게 관심이 많다.”


동생편지를 받은 웨이씨는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가관이었다. “중국은 약소국이다. 약한 나라는 외교라는 게 없다. 중국 외교관이라면 꼴도 보기 싫다. 게다가 결혼을 두 번씩이나 했던 놈이다. 그러고 다니려면 빨리 돌아와라.”


웨이씨도 답신을 보냈다. “국력이 약할수록 훌륭한 외교관이 필요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의 불이익을 강요하는 결의문에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다. 두 차례 결혼 경력도 우리 집안에선 흠이 아니다.” 웨이씨는 딸을 데리고 파리로 갔다.


황후이란은 이모와 이모부가 주최한 파티에서 구웨이쥔의 옆자리에 앉았다. 젊은 외교관의 첫인상은 신통치 않았다. 늙은 티를 내고, 의상도 평범했다. 런던이나 베네치아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들에 비하면 빠져도 한참 빠졌다. 춤 추자는 말도 안하고 승마에도 관심이 없었다. 운전까지 못한다고 하자 황후이란은 ‘매력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참석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가 궁금했다.


황후이란은 정치나 중국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파리 강화회의와 중국 대표단, 국제연맹 같은 용어들이 난무하자 정신이 없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옆에 있는 남자에게 위축됐다. 훗날, 영문 회고록에 구웨이쥔과의 첫 번째 만남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그 사람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신상은 물론이고 업무에 관한 얘기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 생활에만 관심을 표명했다.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사람에게 넋을 잃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한적한 창가에 서서 파리의 야경을 감상했다. 나 말고 다른 여자에게도 그러면 어쩔까 걱정이 됐다.”


구웨이쥔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황후이란에게 비싼 선물은 의미가 없었다. 만날 때마다 사탕과 꽃을 거르지 않았다. 하루에 몇 번씩, 그것도 불시에 찾아가는 날이 허다했다. 황후이란은 구웨이쥔이 언제 올 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아침부터 단장하고 연락을 기다렸다.


프랑스 정부는 구웨이쥔에게 차량과 기사를 제공했다. 황후이란은 이것도 신기했다. “집안에 있는 차들은 모두 돈 주고 구입한 것들이다.” 한번은 오페라 구경을 갔다. 국빈들이나 앉는 자리에서 관람한 황후이란은 황홀했다. “아버지도 누리지 못하는 영광이었다. 버킹엄궁과 백악관, 엘리제궁에서 겪었던 일을 들을 때는 가슴이 뛰었다. 구웨이쥔이 추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이 아닌,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1920년 10월, 영국공사에 임명된 구웨이쥔은 1개월 후 황후이란과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영국의 육군상과 해군상을 겸하던 처칠이 전문을 보냈다. “중국의 실질적인 퍼스트레이디의 출현을 축하한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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