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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 경쟁력 추락한 부산에 혁신 바람 일으키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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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10면

부산과학기술기획평가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한 민철구 원장은 “일자리 등에서 당장의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과학기술은 지역 혁신의 중요한 인프라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프리랜서 박건상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에서 무슨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일까.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과학기술 전문 기관을 부산시 산하 기관으로 새로 만드는가 하면, 그 기관장은 지역과 인연이 없고 더구나 부산시장의 측근이 아닌 사람이 맡았다. 과학계에서 부산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이유다.


부산과 아무 연고 없는 서울 토박이지난달 23일 개원식을 한 부산과학기술기획평가원(BISTEP)의 민철구(60) 초대 원장이 화제의 중심에 선 사람이다. 그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에서 BISTEP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부산과는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 그럴듯한 인연이 없는 그가 기관장이 됐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에 새로운 산하 기관이 생기면 지자체장의 측근이나 해당 지역 CEO들이 기관장을 맡는 게 보통이다. 민 원장은 서울 토박이로 경복고와 서울대 자원공학과를 졸업했다. 서병수 부산시장과도 일면식이 없는 사이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서 부산시장이 BISTEP를 만들면서 원장 자리를 철저히 능력 위주의 전문가에게 맡겼다는 후일담이 사실인 듯했다.


?민 원장은 과학계에서 ‘걸어다니는 과학기술 정책 도서관’으로 통한다. 1981년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이후 지금까지 30여 년간 과학기술정책 연구의 외길을 걸어오며 쌓은 지식이 많아서다. 과기 정책을 토론하는 자리면 어김없이 참석해 논리적으로 문제를 풀고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다. 이를 볼 때마다 “‘과기 정책 9단’은 되겠구나” 하며 필자는 감탄하곤 했다.


 ‘지역 혁신을 위한 지역 대학 역할 정립과 활성화 방안’ ‘지역 대학과 출연연구원의 협력시스템 구축 방안’ ‘과학기술 혁신 5개년 계획’ 등 그가 연구책임자 또는 실무책임자가 됐던 연구과제만 무려 150여 개다. 그 결과물은 지금도 우리나라 과학계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가 실무책임자였던 1997년 과학기술 혁신 5개년 계획의 경우를 보자. 당시 우리나라 정부예산 중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2.6% 수준이었다. 이를 5년 안에 3.5%로, 10년 후에는 5% 수준까지 끌어올리자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예산을 기술과 사업분야별 배분율까지 제시해 총 11권 분량의 방대한 계획을 짰다. 이 계획은 대부분 실현됐다. 지역 혁신을 위한 과학기술 역할에 대해서도 그는 다양한 연구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래저래 부산과 민 원장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부산시는 자체 과학기술 역량을 대대적으로 진흥시켜야 하고, 민 원장으로서는 수십 년 연구해 왔던 과기 정책 지식을 현장에서 실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았기 때문이다.


  민 원장의 부임 소식을 접하고 부산시가 무엇이 답답해 그런 기관을 세웠는지 궁금했다. 해운대 주변과 옛 수영비행장 터에 수없이 솟아 있는 고층빌딩 숲을 보면 부산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대부분의 지자체가 과학기술 진흥을 구호로만 외치는 상황에서 부산이 깃발을 들고 나설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학기술을 진흥시킨다고 해서 서 부산시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일자리 창출이 당장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시, 민 원장에게 인사·예산 자율권민 원장은 “과학기술이 지금 당장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더라도, 만들어지는 일자리를 질적으로 높이는 효과가 크다. 지금은 탄탄하고 좋은 일자리가 중요한 때다. 장기적으로 지역 혁신의 중요한 인프라 역할도 한다. 부산의 과학기술 경쟁력이 다른 지자체와 비교해 해가 다르게 추락하고 있는 것도 부산의 위기 중 하나다. 이를 타개해 보자는 게 부산시가 BISTEP를 설립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서 부산시장은 4선 국회의원 출신이다. 서강대 경제학과와 미국 북일리노이대 경제학 박사인 그가 과학기술 진흥에 손을 댄 것을 보고, 언뜻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했을 때가 떠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과학기술 진흥 없이는 국가의 발전이 더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 1966년 KIST를 설립했다. 설립 이후에는 한동안 감사원 감사도 면제하면서까지 자율권을 부여했다.


  서 부산시장은 BISTEP의 운영권을 전적으로 민 원장에게 맡겼다고 한다. 보통 감시자 또는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시청 공무원의 파견도 없다. 지금까지 인선을 하면서 단 한 명도 인사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청탁이 없었다”는 말은 믿거나 말거나일 수 있지만 민 원장의 눈빛에서 그 말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민 원장이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의 무게 또한 느껴졌다. 자율권을 얻는 대신 그 결과에 대해 엄정하게 평가를 받는 게 세상사의 이치 아닌가.


부산 연구개발 인력·투자액 바닥권부산시는 6대 광역시 중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하고 성장률 역시 매년 내리막이다. 과학기술 지표도 부산의 위기가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있다. 서울, 인천 다음으로 인구규모가 크지만 16개 시·도 중 부산시의 R&D 인력은 1만5564명으로 5위다(2012년 기준). 인구 1만 명당 연구인력으로는 11위다. 지역 내 총생산(GRDP) 대비 연구개발 투자액 비중은 1.62%로 12위, 연구원 1인당 산학연 협력 국내 특허등록 건수는 0.0124건으로 14위다. 이렇듯 부산시는 과학기술 측면에서 볼 때 성장동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민 원장은 이런 현상을 “서울을 비롯한 중앙의 혁신이 지방으로 흘러내려갈 때 길목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다양한 축(지방)에서 혁신이 일어나야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부산시 과학기술 컨트롤 타워의 수장으로 민 원장이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간 체계 없이 이뤄졌던 과학기술 과제의 발굴·기획·지원·평가가 그의 지휘 아래 이뤄지게 된다. 그가 관여하는 과학기술 연구비는 연간 5300억원 정도다. 가만히 앉아서 부산시나 다른 연구자들이 가져오는 연구과제를 손보는 것만이 그의 역할은 아니다. 부산시의 발전을 도모할 과학기술 관련 마스터플랜 수립 및 시행, 대형 연구과제 기획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오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가 서 부산시장의 적극적인 지원과 구성원의 협력으로 일으킬 ‘부산발 과학 바람’이 다른 지방으로 퍼져 전국적인 과학기술 혁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민철구 원장 1955년 서울 출생. 서울대 자원공학 학사 및 기술경제학 박사,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원장,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정책연구소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 역임. 현재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정책조정 위원.


박방주 교수=중앙일보에서 20여 년간 과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09~2012년 한국과학기자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 전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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