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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신격호 총괄회장의 오락가락 기억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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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일보]

롯데그룹 신격호(94) 총괄회장의 ‘되돌이표 분노’가 경영권 분쟁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지난 8일 장남 신동주(61)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아버지의 친필 위임장을 받아 동생인 신동빈(60) 롯데그룹 회장을 상대로 한국과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이번에는 총괄회장이 인터넷 매체 기자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집무실에 불러들여 자신의 입으로 차남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신 총괄회장은 11일 인터넷 매체를 통해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이상하다느니 바보가 됐다느니 하면서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다니 이건 대단한 범죄 아니냐”며 “자신(신동빈 회장)은 장남이 아니라, 장래에 장남이 후계자가 될까봐 이런 일을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차남을) 회장직에서 내려오도록 하고, 스스로 벌어온 돈이 없고 손해만 봤으니 이에 대한 책임을 물으라”면서 “형사를 포함한 소송을 철저하게 진행하고, 내 재산을 마음대로 하려고 했으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분을 삭히지 못했다.

신 총괄회장의 본심이 실제 이와 같다면 롯데그룹의 미래를 포함, 경영권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신격호 총괄회장의 행보에 대해 일반인들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두명의 ‘신격호’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한명은 폐허에 가까운 한국경제를 일으킨 ‘기업가 신격호’이고, 다른 한명은 기억이 왔다갔다 하는‘노인 신격호’이다.

그의 기억이 왔다갔다 한다는 점은 8일 기자회견 내용과 11일 인터넷 매체에 나온 내용에서도 알아챌 수 있다. 신 총괄회장이 예전이 나온 내용을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뉴스를 접한 양 그때그때 분노를 표시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되돌이표 분노’이다.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이 이런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배경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실제 이같은 발언을 직접 했고, 그런 의중을 분명히 갖고있다는 점을 입증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오락가락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이 부자간 관계를 악화시키며 롯데그룹의 리더십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지적이다. 이사회와 주주총회의 결의를 거쳐 적법하게 회장직에 오른 신동빈 회장은 ‘멀쩡한 아버지를 정신이상자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 소송 이외의 사안에 대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신격호 회장은 지난 8월 TV를 통해 공개된 동영상에서 자신이 신동빈 회장을 한국대표에 임명한 것을 잊기도 했고, ‘한국롯데홀딩스’란 존재하지도 않는 사명 언급하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사업에서 손해본 내용을 마치 처음들은 사건처럼 매번 거론하며 차남의 형사처벌을 주장한다. 롯데그룹 측은 마지못해 “롯데의 중국사업은 총괄회장님께 수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보고되어 왔다”고 소극적으로 반박했다.

신 총괄회장의 오락가락 기억력은 지난달 17일 신동빈 회장이 국정감사장에서 했던 증언을 뒤엎는 것이어서 후폭풍의 우려가 있다. 당시 국감장에서 신 회장은 “(호텔롯데 기업공개에 대해) 아버지께 필요성을 모두 설명드렸고, 허락을 받았다”라고 증언했다. 호텔롯데 기업공개는 신동빈 원톱 체제를 뒷받침하는 가장 큰 이슈이고, 롯데그룹의 순환출자를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는 자금력을 제공한다. 신 총괄회장이 진정 신동빈 회장의 형사처벌까지 지시할 정도로 분노했다면 신동빈 회장이 추진하는 호텔롯데의 IPO를 절대 허락하지 말았어야 했다. 허락한 사실이 거짓이라면 신동빈 회장은 위증죄로 고발대상이다.

신 총괄회장에게 보고를 올리는 계열사 사장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 양 알면서도 ‘사실’을 꺼내놓지 못한다. A계열사 사장은 “총괄회장은 한 달 전 보고한 내용도 기억 못해 현재 총괄회장 보고는 예의상의 절차일 뿐”이라며 “총괄회장은 ‘잘해’ ‘기본이 튼튼해야 해’처럼 같은 말을 해 수차례 ‘예 알겠습니다’를 반복한다”고 털어놨다. B계열사 사장은 “방금 보고하러 다녀왔는데 왜 보고 안 했느냐고 해서 다시 차를 되돌려 총괄회장한테 갔다. 그랬더니 절 보시고 ‘어디 소속이냐’고 물으시더라”며 씁쓸해했다.

C 계열사 사장은 “고령치고는 건강하시지만 경영자로서 의사결정을 하기엔 부적합한 상황”이라며 “다만 경영원칙 등 강조하시는 말은 모두 가슴에 새기고 있다”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익명을 요구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D씨는 “정신이상이라기보다는 90세 이상이 되면 찾아오는 노환일 뿐”이라며 “단지 노환으로 인해 롯데그룹의 리더십에 장애가 온다면 일반국민이 우롱당하고 기업가치를 떨어뜨리는 등의 사회적 손실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신격호 총괄회장의 인터뷰와 관련 롯데그룹은 자료를 내고 “ 이미 지난 8일 기자회견을 통해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힌 상황에서, 이처럼 총괄회장님을 앞세워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진행하고 있는 롯데의 기업개선 활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한편 롯데그룹은 이날 인터넷 매체 기자가 총괄회장 집무실을 들락거린 사실이 드러나자 직접적인 이해당사자 외 34층 출입을 더 엄격히 통제하기로 했다. 신동주 전 부회장 측은 인터넷매체 기자 일행이 호텔로비에서 여러 사람과 휩쓸려 34층으로 올라갔다고 해명했으나 실제로는 신 전 부회장이 직접 1층 로비에서 만나 대동하고 올라갔다는 사실이 1층 경비원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심재우 기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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