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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반군 황즈신 ‘장사의 신’으로 제2 인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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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29면

쑹즈원(宋子文. 앞줄 왼쪽 여섯번째)과 함께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UN헌장 작성 회의에 참석한 구웨이쥔(앞줄 왼쪽 다섯번째). 앞줄 왼쪽 두번째는 중공대표 동비우(董必武).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

1850년 봄 싱가폴 화교 천칭쩐(陳慶眞·진경진)이 귀국을 서둘렀다. 고향 푸젠(福建)으로 돌아와 소도회(小刀會)라는 혁명조직을 결성했다. 일년 후, 양광(廣東과 廣西)지역에서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반란을 일으켰다. 소도회도 덩달아 번성했다.


사숙에서 경전만 읽던 푸젠 청년 황즈신(黃志信·황지신)은 소도회에 흥미를 느꼈다. 마을 입구에 “두 개의 길이 있다. 어느 쪽을 택하건 너와 나를 가리지 말자. 4면이 허공이다. 서쪽으로 갈 사람은 서쪽으로 가고, 동쪽으로 갈 사람은 동쪽으로 향하자”고 크게 써 붙였다. 제 발로 소도회를 찾아갔다. 18세 때였다.


황즈신은 5년 간 전쟁터를 누볐다. 물자 조달 능력이 뛰어났다. 태평천국도 실패하고 소도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배자 신세가 된 황즈신은 갈 곳이 없었다. 작은 배에 올라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았다. 해안선은 보이지 않았다. 배 안에 화약이 한 상자 있었다. 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품 안에 있던 향(香)에 불을 댕겼다.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내 명이 오늘까지라면, 배가 불타고 물고기 밥이 되도 원망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기 바란다”며 향을 화약상자에 꽂았다. 흐린 하늘, 습기가 많다 보니 향불은 오래가지 않았다.


죽을 팔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맘이 편했다. 순풍을 타고 도착한 곳이 네덜란드의 식민지 자바였다. 자바에는 화교가 많았다. 이왕 죽은 거나 진배없던 몸, 못할 일이 없었다. 화교가 운영하는 잡화상에 일자리를 구했다. 주인은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고향 청년을 총애했다. 싫다는 외동딸을 억지로 황즈신의 방 안에 밀어 넣었다. “잡아먹던, 삶아먹던 네 맘대로 해라.”


반란군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황즈신은 경영에 소질이 있었다. 6년 만에 잡화상을 번듯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특산품 사탕수수와 연초를 중국에 수출하고, 비단과 차, 향료 등을 수입해 부를 축적했다.


1901년 황즈신은 미화 700만 달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700만 달러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기업 경영은 장남 중한(仲涵·중함)에게 맡겼다. 차남에게는 재산을 떼어주며 형 회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황중한은 걸물이었다. 공인된 부인만 18명이었고, 그 중 세 명은 친자매였다. 부인 중에는 모녀지간도 있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젊은 시절 도박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빌려준 돈 받으러 갔다가 도박장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받은 돈을 다 날리자 바닷가로 갔다. 투신할 작정이었다.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여인이 있었다. 딸과 같이 사는 예쁜 과부였다. 나이는 십여 살 위로 한 달에 한두 번 만나던,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황중한을 좋아하던 과부는 남편의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건넸다. “훗날 우리 모녀를 모른 체하지 말기 바란다.” 황중한은 한번 한 약속은 손해를 봐도 지키는 사람이었다.


세상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지하조직과 혁명가들에게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화주의자 차이어(蔡鍔·채악)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거금을 쾌척한 사람이 황중한이었다. 공익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화교학교를 동남아 곳곳에 설립했다.


자바의 서양인들은 중국인들을 멸시했다. 돼지라고 부르며 중국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황중한은 중국인, 특히 한족(漢族)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재력과 지혜를 동원해 금기(禁忌)를 깼다. 네델란드 귀족 출신 변호사를 고용해 총독과 교류를 트고, 여왕이 파견한 자바주재 대표도 구워삶았다. 중국인 최초로 서양인 거주지역에 상호를 내걸고 저택도 지었다. 정원사 50여명이 모자랄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구웨이쥔의 부인 시절, 네덜란드를 방문해 여왕 모녀와 환담하는 황후이란.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구웨이쥔(顧維鈞·고유균)의 세 번째 부인 황후이란(黃蕙蘭·황혜란)은 황중한의 조강지처 웨이(魏·위)씨 소생이었다. 황중한은 혈통을 중요시했다. 황후이란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버지는 자식이 태어나면 손가락부터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새끼 손가락이 살짝 휘어야 친자식으로 여겼다. 멀쩡하면 황씨가 아니라고 단정했다. 내 새끼 손가락은 정상이었다. 그래도 나를 친자식으로 인정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남의 집 문지방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런던에서 구웨이쥔과 결혼한 후 베이징에 갈 일이 있었다. 도중에 페낭에서 잠시 하선했다. 두 여인이 내 어깨를 치며 반가워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내 동생이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새끼 손가락이 휘어 있었다. 아버지의 열 여덟 번째 부인 아들은 미국에서 다른 부인의 손녀와 열애에 빠졌다. 남자의 아버지가 여자애의 할아버지인 셈이었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 결혼이 불가능했다. 네덜란드까지 달려가 결혼수속을 밟았다. 우리 집안은 이 정도로 엉망이었다.”


구웨이쥔과 황후이란은 영국에서 처음 만났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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