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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턴’이 판타지인 까닭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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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철근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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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근
논설위원

영화 ‘인턴’이 뒤늦게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이른바 역주행을 하고 있다. 반응도 좋은 편이다. 관객들의 영화평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힐링’이다. 영화는 70세 시니어인턴(로버트 드니로)과 젊은 직원들 간의 따뜻한 소통을 그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괴팍한 편집장(메릴 스트립)의 인턴으로 고생했던 앤 해서웨이는 이 영화에선 패션쇼핑몰의 CEO로 나온다.

 전화번호부 제작사의 부사장까지 지냈던 할아버지 인턴은 전형적인 아날로그 세대다. 아직도 손수건을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지니고 다녀야 하는 기사도의 소품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디지털 세대와 소통을 위해 페이스북에 가입하는 적응력도 가졌다. 회사의 최말단 계급인 인턴이지만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반전의 능력을 발휘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중간에 ‘낀 세대’인 나로선 공감되는 대목이 많았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자 왠지 허탈했다. 기분 좋은 꿈을 꾸다가 알람 소리에 잠을 깨고 냉혹한 현실세계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웃음과 감동을 잘 버무린 코미디물인데 내겐 현실감 없는 판타지물로 느껴졌다.

 토익 900점, 병장 만기 제대, 각종 알바 경력 vs 토익 스피킹 160점, 미국대학 교환학생, 외국기업 무급인턴.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신규직원을 뽑는다면 누구를 고를까. 아마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악착같이 살아온 생활력보다는 검증된 인턴 경력이 훨씬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인턴은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필수적인 ‘스펙’이 됐다.

 정부는 앞으로 3년간 12만5000명의 청년인턴을 뽑을 예정이다. 지원대상도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확대한다. 정부의 의도대로라면 청년고용은 나아져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거꾸로다.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고치인 10%를 넘어섰다. 인턴 일자리를 아무리 늘려도 정규직 전환율이 낮으면 결국 ‘돌려막기’에 불과하다는 증거다.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이미 심각한 상태다. 그런데 취업의 전 단계인 인턴부터 계급화가 진행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년들은 방학 때 인턴보다는 돈을 버는 게 더 급하다. 당연히 경제적 지원 아래 취업준비에 몰두할 수 있는 중산층 이상 학생들이 기회를 잡는 데 유리하다. 인턴을 하더라도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서 해야 한다. 인사담당자가 들어보지도 못한 기업에서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주장한들 서류전형에서 탈락하기 십상이다.

 결국 좋은 일자리를 잡으려면 인턴 스펙을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 30대에도 인턴을 전전하는 직업이 인턴인 젊은이도 즐비하다. 예전엔 ‘헬 조선’이 싫으면 기회를 찾아 해외로 떠나는 꿈이라도 가졌다. 그런데 다른 나라도 비슷한 상황이다. 특히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무급인턴이 크게 늘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 인턴으로 입사해도 정규직이 되려면 영혼을 팔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

 매년 2000명 넘는 인턴을 뽑는 골드먼삭스는 최근 인턴의 밤샘근무를 금지했다.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던 인턴과 신입사원들이 과로로 숨지거나 스트레스로 목숨을 끊는 사고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유럽의 명품 패션기업에서도 구직자의 꿈을 담보로 무급인턴을 강요한다. 유명 패션디자인 스쿨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해도 롤모델처럼 되려면 ‘시다’ 같은 삶을 감내해야 한다. 착취형 인턴이 물의를 빚자 미국 노동부는 2010년 무급인턴 지침을 만들었다. 훈련생의 이익(교육·취업기회)을 위한 프로그램이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그래도 해외기업 인턴은 뭔가 배우는 것이라도 있다. 국내에선 정부 지원을 받는데도 교육·훈련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돈을 줄 수 없으면 배움의 기회라도 달라는 게 취업준비생들의 요구다. 하지만 현장에선 친절하게 가르치는 ‘멘토’는커녕 권위적인 ‘꼰대’를 안 만나면 다행이다. 젊은이들이 영화 인턴을 보면서 각박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위안을 받는 이유다.

정철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