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빽다방과 블랙프라이데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기사 이미지

양선희
논설위원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싼 물건에 대해선 품질이든 만족감이든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 다만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게 되면 가격 이상으로 행복해질 뿐이다.

 최근 몇몇 젊은 청춘들에게서 ‘빽다방’이라는 커피집에 대해 여러 차례 칭송을 들은 터라 점포에 가봤다. 요즘 애들 말로 좀 ‘시골스러운’ 커피집이었다. 한데 싸고 푸짐했다. 커피값이 1500~3500원. 아메리카노·카라멜마끼아또 같은 커피 전문점 메뉴도 있지만 달달한 옛 다방커피나 사라다빵 같은 추억의 메뉴도 있다. 한 젊은 친구는 “옛날식 감자샐러드가 듬뿍 들어 있는 사라다빵은 하나만 먹으면 한 끼가 든든하다”고 했다. 싸고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다방이다.

 요즘 저가 커피전문점은 일종의 유행이다. 이 집 말고도 많다. 그럼에도 청춘들은 이 집에 유독 열광한다. 이 집은 요즘 주부계의 기린아로 칭송 받는 ‘백주부’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만든 프랜차이즈다. ‘흔한 재료로 고급지게, 값은 싸도 맛있게’를 줄곧 외치는 그의 음식철학이 촘촘하고 경직된 가격구조에서 해방된 후련함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

 반면 좋은 물건을 싸게 판다는데 실제론 호갱 취급 당하는 듯한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이틀 동안 블랙프라이데이 행사가 열리는 백화점들을 헤매고 다녔다. ‘취재차’는 오히려 핑계였고, 실제론 오랜만에 물건을 사고 싶었다.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재고로 창고에 넘기기 전 물류비를 아끼는 만큼 소비자에게 돌려주겠다는 철학이 확고한 만큼 엄청 싸서 행복하다. 이런 기억을 더듬어 뭐라도 하나 건질 줄 알았다. 한데 하나도 사지 못했다. 정기 세일보다도 심한 ‘미끼상품의 향연’이었다. TV에선 쇼핑 인파가 몰렸다는데, 나는 시내 백화점에서 한나절 넘도록 한가하고 쾌적하게 ‘눈팅’ 쇼핑을 했다.

 유통업계 관계자에게 “이번 행사는 해도 너무 했다”고 말했다. 한데 그들은 신랄했다. “요즘은 제일 무서운 게 공무원이다. 관제 유통행사라는 무식한 기획을 마구잡이로 하란다.” “공정거래위는 이번 기간 동안엔 백화점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강요하는 행위도 눈감아주겠다고 했다.” 제조업체 관계자도 냉소적이었다. “이제 막 FW(가을겨울)시즌 신상품을 매장에 깔았다. 지금부터 잘 팔리는 품목과 부진품목을 가려내는 간 보는 기간인데 완전히 엉켜버렸다. 10월 초에 재고를 터는 나라가 어디 있나.”

 한마디로 파는 쪽이 마음에도 없는 행사를 했으니 소비자도 감동이 없었던 거다. 물론 정부의 의욕이 과했다. 정부는 가격에 개입하려는 의욕을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한편으론 과연 우리나라에서 소비자에게 감동과 행복을 주는 가격이 가능할까 생각해봤다. 대답은 ‘글쎄’다. 한 예로 백화점은 물건값의 30~40%를 수수료로 거둬가는 전형적인 ‘통행료’ 장사를 한다. 이 때문에 다른 나라 백화점 업태가 사양길에 접어들어 허덕여도 우리 대형 백화점들은 여전히 분기별로 수백억원대의 영업이익을 낸다. 제조업체들도 신상품인 1차 창고 물량부터 반품과 재고별 2~4차 창고별로 정형화된 가격질서를 유지한다. 또 일부 업체들은 ‘비싸야 팔린다’는 개발연대 이래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재와 같은 굳건한 가격결정 구조하에서 과연 좋은 물건 싸게 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은 물건을 파는 것도 사는 것도 어려운 시절이다. 파는 쪽에선 소득수준과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소비자의 안목과 상품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져 품질을 높여야 한다. 소비자는 수준은 높아졌는데, 가처분 소득은 줄어 쓸 돈이 별로 없다. 그러니 내수와 소비를 활성화하려면 할인 이벤트가 아니라 진짜 좋은 물건을 싸게 팔고 사는 새로운 가격질서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지금 필요한 건 2000원짜리 배부른 사라다빵처럼 빽다방식의 창의적 가격결정 구조와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격 철학인 것 같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