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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선제적 대응만이 감염병 재앙 막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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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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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갑
한림의대 감염내과 교수

그제 116일간 세계 최장기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양성 환자였던 80번 환자가 드디어 음성 판정을 받았다. 이에 따라 29일 한국은 메르스 완전 종식을 선언할 수 있게 됐다. 돌아보면 2014년과 2015년은 유독 신종 감염병이 우리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줬다. 에볼라와 메르스의 한복판에서 감염내과 의사로 살면서 우리 사회가 가진 약간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동시에 경험했다.

 필자는 에볼라 긴급구호대 2진 대장으로 올 2월 시에라리온으로 파견됐다. 한국이 처음으로 감염병 재난현장에 긴급구호대로 나간 것이다. 당시 여러 국가에서 의료진 파견을 희망했지만 실제로 에볼라 환자 진료가 가능했던 나라는 10여 개국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한국이 포함된 것이다.

 현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보호복 착용 원칙이 끝까지 느슨해지지 않고 지켜졌다는 것이다. 근무 3주째였다. 이제 3주나 보호복을 입었으니 눈을 감고도 입을 정도로 숙달됐는데 보호복 착용상태를 점검하는 현지 직원이 보호복에 작은 흠이 발견됐다고 옷을 두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입게 했다. 35도가 넘는 날씨에 이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짜증이 났지만 안전한 보호복 착용이 스스로를 지키는 기본 원칙임을 되새기게 됐다. 신종 감염병의 대비는 이러한 철저한 점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귀한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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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볼라 파견을 준비하고 파견이 실제 이뤄질 무렵까지 감염병 위기가 국내에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고 많은 대책이 논의됐다. 하지만 긴급구호대 파견이 종료된 3월에는 에볼라를 경험하면서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된 수많은 감염병 대응정책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있었다.

 에볼라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5월 20일 첫 메르스 환자가 국내에서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5월 29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환자가 발생한 이후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신종 감염병은 초기 과감한 대응만이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너무나도 뼈아픈 진실을 다시금 깨달은 순간이었다.

 6월 8일 메르스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의 즉각대응팀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메르스가 발생한 지방의 중소병원을 방문해 병원 내 메르스 감염 관리, 노출자 관리, 병원 기능 회복을 위한 자문에 응하게 됐다. 여러 병원의 메르스 발생상황을 지켜보고 자문에 응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책들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째, 중소병원의 감염 관리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현재 중환자실이 있는 200병상 이상에만 감염관리실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병원급 의료기관에는 모두 감염관리실 설치가 필요하다. 이러한 행정적 조치들은 재정적 지원을 통해 유도해야 하며 재정 지원 이후 실제로 잘 적용되는지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

 둘째, 중소병원 감염 관리를 지원할 수 있는 범정부 차원의 사업단을 구성해 장기적인 계획하에 교육과 행정적인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지역사회 대학병원과 중소병원의 감염관리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좋은 협력모델이 된다.

 의료 시스템과 관련한 신종 감염병 대책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 호흡기 관련 감염병 관리를 위해 국가 차원의 규격화된 음압격리병실 보급이 선행돼야 한다. 둘째, 호흡기 관련 감염병의 원인 확인 전까지 선제적인 1인 격리 입원의 보험수가 인정이 필요하다. 셋째, 포괄간호제도의 조기 정착을 통해 보호자 없는 병동을 확대 적용하고 면회를 제한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응급실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병원의 환자 쏠림을 해결하고 응급실 내 감염병과 비감염병 진료구역을 별도로 설정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다섯째, 감염 전문병원을 설립해 국가적인 감염병 위기 시 초기에 위기를 인지하고 치료하도록 하며 평상시에는 세계적인 감염병의 유행을 예측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하게 해야 한다. 여섯째, 감염 관리에 종사하는 인력 양성이 시급하다. 감염 관리 간호사, 감염내과 의사, 병원 내 유행상황을 조사하는 병원 역학자 등 충분한 인력 양성만이 감염병을 관리하는 초석이 될 것이다.

 감염병 관리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숙제다. 충분한 재정 지원이 선행돼야 하며 의료기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환경 변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질병관리본부와 민간 전문가들이 머리를 싸매며 진행한 많은 정책이 정작 예산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다른 정책들에 밀려 축소되거나 폐지됐던 경우가 많았다. 신종 인플루엔자와 에볼라를 겪고 나서도 우리나라 감염병 관련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이로 인해 메르스는 우리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고 내수 소비 위축으로 경제가 비틀거렸다. 이제부터라도 메르스로 인한 국가적 어려움이 부디 우리나라 감염병 관련 정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쓰디쓴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이재갑 한림의대 감염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