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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아베 신조, 역사에 등을 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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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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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조부 세대로부터 두 줄기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나는 반전·평화주의 정치가였던 할아버지 아베 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것이다. 아베 간은 태평양전쟁 발발 다음해인 1942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도조 히데키의 군벌정치를 비판하면서 당선된 반골 정치인이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전시내각의 상무대신으로 군수물자 조달의 총책임자였다.

 아베 신조는 친할아버지를 제치고 외할아버지를 롤모델로 선택해 일본의 군국주의적 과거를 선양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역사수정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아베의 등장으로 한·일, 중·일 과거사 갈등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외할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는 아베에게 평화헌법 9조는 목의 가시다. 헌법을 고쳐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다시 세계에 대국으로 군림하는 것이 그의 꿈, 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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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내각은 지난해 7월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각의 결정’을 내리고 올 들어서는 11개의 안보 관련 법안을 중·참의원에서 통과시켰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이, 더 실질적인 안보 역할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꾸준히 받아 왔다. 그래서 지난해 아베의 미국 방문 때 두 나라의 외무·국방장관들이 만나는 2+2 회의에서 1978년 제정되고 97년 북한의 핵 개발을 염두에 두고 개정된 방위가이드라인을 다시 강화·개정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앞선 두 개정가이드라인의 극동 유사시, 주변 사태의 활동범위를 글로벌 규모로 확대해 미군이 전쟁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지 일본 자위대가 참전하는 길이 열렸다. 미·일 군사일체화가 실현된 것이다.

 일본의 군국입국에 아시아 국가들은 불안하다. 일본에는 세계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국제적인 부전(不戰)조약 위반의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후 미국과 프랑스가 부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 조약은 국제연맹의 비준을 받아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은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되었다. 그런 일본이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추축을 형성해 2차 대전을 일으켜 5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일본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불신이 깊어 가는 가운데 집단자위권의 범위 확대, 미·일 방위 가이드라인의 강화로 군사·안보에 관한 한 일본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참으로 불길하다.

 아베에게는 구체적인 전쟁 유전자가 있다. 1954년 자위대가 창설되자 재군비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본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요시다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하토야마를 총재로 일본 민주당을 창당해 간사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미국이 강압적으로 만든 헌법을 개정해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바꾸어 진정한 독립을 확립하는 개헌과 재군비를 주장했다. 그러나 1955년 총선에서 일본민주당은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아베는 외할아버지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일본에서 나온 『군사입국에의 야망』이라는 책의 네 명의 공저자들은 (1)병기체제·설비 같은 하드웨어 (2)법률·제도·조직 같은 시스템 (3)인재·가치관·전략 같은 소프트웨어를 전쟁을 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로 든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군사전략에 추종하는 일본의 전쟁 대응 체제는 하드웨어가 선행하고, 시스템과 소프트웨어가 따르는 방식이다. ‘이즈모’형 헬리콥터 탑재 항공모함과 수백㎞의 범위를 커버하는 레이더를 장착한 5척의 이지스함이 하드웨어의 대표적 사례다. 선행하는 하드웨어에 법체계와 제도(시스템)와 가치관(소프트웨어)이 따른다. 아베는 ‘재생교육’이라는 걸로 교육제도를 뜯어고쳐 자학사관을 탈피하고 일본에 대한 존경과 자존심을 되살리려고 한다.

 이마누엘 칸트:“전쟁에는 특별한 동인(動因)은 필요 없다. 명예욕이 발동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아베가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치기 어린 명예욕이 주위를 불안하게 한다. 시사지 ‘이코노미스트’의 2013년 1월 5일자 아베의 극우행보 비판 기사 제목이 ‘역사에 등을 돌리다(Back to the future)’인 건 시사적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는 소년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1955년의 과거로 돌아간다. 영화 속의 백(back)은 과거로 돌아감을 의미하지만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아베 신조는 미래에 등(back)을 돌린다. 아베 묘사에 걸출한 제목이다. 그는 미래를 말한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 밝은 미래는 없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