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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의 직격 인터뷰

민주주의와 좋은 정부의 첫째 조건은 언론의 자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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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박종근 기자 중앙일보 비주얼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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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던 교수는 “경제가 더 발전해도 중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면서 중국과 서구의 정치사에서 좋은 점을 결합한 시스템을 추구할 걸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서울에서 워싱턴, 도쿄에서 이스탄불까지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파열음을 내고 있다. 기름칠 한 기계처럼 부드럽게 굴러가는 곳이 드물다. 능력주의와 경쟁에 기반한 중국식 정치 제도가 차라리 낫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과연 민주주의는 한계에 봉착한 것인가. 정치 사상과 정치 이론의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존 던(75) 영국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 명예교수를 만나 위기 속의 민주주의를 진단했다. 연세대 동아시아평화센터가 ‘동아시아와 보편평화 구상’을 주제로 개최한 국제 학술회의 참석차 방한한 그를 지난 15일 서울에서 만났다.

존 던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 명예교수

- 좌파주의자인 제러미 코빈이 최근 영국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다. ‘제3의 길’을 좇아온 ‘뉴레이버(신노동당)’ 운동도 막을 내린 걸로 봐야 하나.

 “노동당이 추구해온 ‘제3의 길’ 정치가 중대한 분수령을 맞은 건 틀림없지만 노동당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코빈은 사회운동을 하다 우연히 국회의원이 됐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란 걸 해본 일이 없는 인물이다. 노동당 의원 대다수가 그와 대화조차 나눠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당수로 뽑힌 것은 노동당의 변화를 원하는 일반 당원들의 지지 덕분이다. 코빈은 확실한 좌파주의자이고, 뉴레이버 운동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당내 사정을 감안할 때 그가 원하는 대로 당을 끌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코빈의 노선은 좌파주의보다 포퓰리즘에 가까운 것 아닌가.

 “좌파주의적 정책을 많이 제시했지만 구체적 실천 방안에 대해서는 밝힌 게 없다는 점에서 그는 포퓰리스트가 맞다. 깊이 있는 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은 정책이 대부분이다. 의회에 몸담은 지는 오래됐지만 여전히 아마추어라고 할 수 있다.”

 - 2020년에 있을 차기 총선에서 그가 총리가 될 가능성은 없다는 뜻인가.

 “코빈이 당수가 됨으로써 차기 총리가 노동당에서 나올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본다.”

 -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극우파가 점점 세력을 넓혀 가고 있다. 유럽 민주주의에 경고등이 켜진 것 아닌가.

 “극우파의 부상은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한 반작용이기 때문에 위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우려가 해소될 것이란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극우파의 부상이 단순히 경제적 요인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유럽의 비교적 잘사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조차 직업 정치인들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장기간 누적된 결과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 따라 정치 제도의 정당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정부가 추진해야 할 정책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고 동의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50년 전 내가 젊었을 때와 비교하면 정치인들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은 거의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들이 혐오와 경멸의 시선으로 직업 정치인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현상’을 어떻게 보나. 미국 민주주의의 퇴보인가 고장인가.

 “기성 정치인에 대한 미국 유권자들의 부정적 인식 탓이 크다고 본다. 정치권에 몸담지 않았던 아웃사이더가 정치권에 진입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기가 과거에 비해 훨씬 용이해졌다. 그렇더라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

 - 미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라고 보나.

 “중요한 정책을 장기적 시야에서 진지하게 밀고 나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매우 단기적으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는 것은 정당성뿐만 아니라 효율성 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주도해온 미국에서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버몬트주) 상원의원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분배 효과 측면에서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를 막는 데도 실패했다. 신자유주의 도입 이후 미 정부의 정책은 극소수의 가진 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추진돼 왔다. 그에 대한 불만이 반영된 결과로 본다.”

 - 민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결함 때문인가, 아니면 운영의 문제인가.

 “민주주의는 정치적 효율성을 보장하는 레시피(조리법)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정부를 구성하고, 정부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구조와 기반, 그리고 권위의 근거에 관한 정치적 아이디어일 뿐이다. 민주주의를 한다고 좋은 국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데는 직업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그들은 상스럽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정식 명칭에서 보듯이 북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개념인가, 아니면 나라마다 형태가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인가.

 “민주주의란 말의 어원인 ‘데모스(demos)’가 촌락(村落)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나라마다 형태가 다른 것은 당연하다. 민주주의에서 정부의 권위는 시민들로부터 나온다. 민주주의의 형태는 나라마다 달라도 보통선거와 자유선거의 원칙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북한을 민주주의 국가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 지금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나라는 어디라고 보나.

 “북유럽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잘하고 있다고 본다.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도 인상적이다. 부패나 법치에서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도의 높은 투표율은 빈민을 포함해 전체 성인 인구의 절대 다수가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이식하려던 미국의 시도가 실패한 이유는 뭐라고 보나.

 “효율적인 국가 기구는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혼돈 속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는 어렵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효과적인 정치·경제 질서가 갖춰져야 한다.”

 -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를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면 좋은 정부의 조건은 무엇인가.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가져야 한다. 그 의도의 초점은 국정의 대상인 시민들의 이익에 맞춰져야 한다. 효과적인 조직과 제도도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가 직면한 주요 이슈들에 대한 시민들의 깊이 있는 이해다. 이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느냐가 민주주의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야말로 좋은 정부를 갖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선거 결과가 51 대 49로 나와도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 한국이나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의 문제점이다. 영국이나 독일식 의원내각제가 민주주의 원칙에 더 부합한다고 보나.

 “같은 대통령제라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 의회에 비해 대통령의 권한이 제한적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립이 정부의 기능을 제약하고 있다. 내각제를 택한 영국은 총리에게 권한이 집중돼 있다. 이렇게 볼 때 헌법적으로는 대통령제와 내각제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 결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대통령제든 내각제든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달린 문제이지 어느 쪽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할 문제는 아니다.”

 - 소셜미디어의 확산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인가 기회인가.

 “민주주의를 위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정에 문제가 많을 경우 소셜미디어는 정권의 불안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힘을 발휘해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만족스러운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소셜미디어는 변덕스럽고 충동적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권위지나 BBC 같은 공영방송의 역할이다. 이런 매체들은 정치적으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 많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비해 소셜미디어는 대중의 흥미를 끌 만한 특정 주제를 선별해 사람들을 흥분시킬 뿐이지 그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진 않는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소셜미디어가 민주주의의 친구 역할을 할 것 같지는 않다.”

 - 능력주의와 경쟁에 기반한 중국식 거버넌스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보나.

 “중국인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날이 온다면 혹시 그럴지도 모르겠다. 최고지도자가 화를 내면 모든 국민이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중국이 가진 최대 약점이다. 이런 상태에서 좋은 정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 앞으로 경제가 더 발전하면 중국도 결국 서구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걸로 보나.

 “그렇게 보지 않는다. 중국 정치사에서 좋은 점과 서구 정치사에서 좋은 점을 결합한 정치 시스템을 갖게 될 걸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는 불확실하다. 중국이 역사적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은 맞지만 매우 위험한 나라인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매우 불안정하다. 중국이 좋은 방향으로 변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걱정스럽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로 인류의 정치적 진화는 종언을 고했다고 주장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가.

 “정치적 권위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자유민주주의 모델보다 나은 제도가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델 또한 중대한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효과적인 처방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단점은 보완하는 방향으로 계속 고쳐나가야 한다.” 

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사진=박종근 기자

존 던 교수는…
1940년 잉글랜드 태생.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에서 정치사와 정치사상을 공부했다. 하버드대 석사를 거쳐 케임브리지대에서 존 로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을 토대로 69년 출간한 저서 『존 로크의 정치사상』으로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떠올랐다. 72년부터 킹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세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93년 케임브리지에 6개월간 체류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계기로 한국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민주주의의 마법에서 깨어나라』를 비롯, 18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