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 대타협, 노무현 사람 발탁한 박 대통령 승부수 통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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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위원장

 노동개혁을 위한 정부의 행보는 2년3개월여 전에 시작됐다. 2013년 6월 14일 김대환 당시 인하대 교수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으로 내정되면서다. 그는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을 지내는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대통령직 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를 지냈다. 2004년 2월에는 노동부 장관으로 취임해 만 2년간 재직했다. 노무현 정부 최장수 장관이다. 노 전 대통령 기일에는 김해를 찾아 참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야당 사람이다.

2년 끈 노사정 협상 막전막후

김 위원장 틈 나면 개혁 필요 역설
박 대통령 “힘 실어 드릴게요”

“임금 올려라, 청년 고용 늘려라”
기재부 끼어들며 한때 협상 꼬여

김대환, 식당 원탁 빌려 소통 물꼬
회의 길어지자 “돌려달라” 재촉받아

 그런 그를 박근혜 대통령이 노사정위원장에 발탁했다. 이게 승부수였다. 김 위원장은 여당엔 시어머니요, 야당엔 친정 사람이다. 여야의 누구도 그를 홀대할 수 없는 역학구조다. 취임(2013년 6월 25일) 후 “누구에게든 할 말을 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일성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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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엔 노동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절실함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 위원장과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필요성을 조목조목 설명한 뒤 분위기가 반전했다. 노동개혁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은 한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이해하면 직진한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노동개혁을 수시로 언급했다. 대국민담화는 물론 정치인을 만나거나 국무회의 때 한번도 빼놓지 않았다. 김 위원장에게는 “힘을 실어드리겠다”며 소신껏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도록 주문했다.

 2014년 8월 29일 노동시장 구조개선 특별위원회가 노사정위원회에 꾸려졌다. 그해 12월 23일에는 노동시장 구조개편에 대한 기본합의문이 채택됐다. 당시 박 대통령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에 김 위원장은 “이제 시작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고 얘기하자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어려운 노사정 합의의 첫발을 뗐는데요”라고 격려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이듬해 엉뚱한 곳에서 협상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정부의 컨트롤타워 격인 ‘기획재정부발 삐걱거림’이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임금 인상, 최저임금 현실화 등을 언급하며 기업을 압박했다. 노동계도 놀랐다. 협상 과정에서 나올 정부의 선물을 먼저 수령하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노조에도 부담이 됐다. 한 대기업 노조 간부는 “부총리가 임금 대폭 인상을 주장하는 바람에 조합원 욕구만 끌어올려 회사에 얼마나 올려 달라고 할지 고민이다. 기업 사정은 뻔한데”라며 난감해했다. 최근 임금 인상을 둘러싼 노사분규와 무관하지 않은 얘기다.

 기업에 대한 압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각 부처 장관을 비롯한 고위층이 나서 청년 채용계획을 내놓으라며 닦달했다는 게 기업 관계자의 전언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노사정 합의도 안 된 상태에서 노동계를 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모범을 보이라며 예정에 없는 채용계획을 내놓으라고 주문해왔다”고 말했다. 올해 갑자기 대기업의 청년 채용계획이 쏟아져 나온 배경이다.

 여기에다 행정행위(지침 제정)를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다. 저성과자 해고 문제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 문제다. 정부가 언론에 흘려 이슈화했다. 고용시장의 격차 해소나 비정규직 보호, 사회안전망 확충, 근로시간 단축과 같은 노동개혁의 본류가 두 가지 사안에 덮였다. 일부 학자는 “행정행위를 협상거리로 만드는 건 정부 스스로 권한을 포기한 행위”라는 비판이 나왔다. 법리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아 법학자로부터 “만들어도 효력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문제가 불거지면서 올해 4월 8일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협상 결렬을 선언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한국노총이 복귀한 뒤에는 고용부 장관이 노사 대표와 합의한 공공부문 원포인트 협의체를 기재부가 파기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대타협 막판 정부서울청사 구내식당의 원형 탁자도 큰 몫을 했다. 지난달 27일 한국노총의 복귀로 노사정 대표가 손을 맞잡았을 때 회의 탁자는 일자형이었다. 그런데 이달 12일 노사정 대표가 회의를 할 땐 원탁으로 바뀌었다.

 노사정위 관계자는 “위원회에는 원탁이 없다”며 “김대환 위원장의 지시로 구내식당에서 빌려왔다”고 말했다. 구내식당 측은 하루 정도 예상했던 대여기간이 길어지자 “빨리 돌려 달라”며 재촉했다. 김 위원장은 “사각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으면 친밀도가 떨어지고 갈등이 첨예해질 수 있다. 둥근 테이블로 심리적 경계선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막판 노사정 대표자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냈다. 특히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호탕한 성격으로 테이블 좌우를 돌아보며 분위기를 여러 차례 반전시켰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은 김동만 위원장이 “쟁점 사안을 절대 받을 수 없다”며 합의에 부정적 태도를 보이자 “좋다. 성과형 임금체계 하나만 주면 정년 폐지든 뭐든 다 주겠다. 줄 수 있느냐”며 압박했다고 한다.

 국장급 실무회의를 없애고 곧바로 차관급 간사회의와 대표자회의로 협상을 진행한 것도 주효했다. 노사정위 관계자는 “실무자들은 자기 입장을 얘기하며 부딪히기만 할 뿐 전혀 협상을 진척시키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간사회의로 진행하다 아예 결정권을 가진 대표자끼리 회의했다. 이게 협상 속도를 끌어올렸다”고 덧붙였다.

김기찬 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